정치권의 노골적인 지상파 방송사 밀어주기에 국가재난안전통신망(재난망) 사업이 주파수를 확정하지 못하고 또 지연될 처지에 놓였다. 방송사와 정치권이 초고화질(UHD) 방송 주파수의 안정적 확보 방안으로 기존 모바일 광개토플랜 재검토를 유도하고, 정부의 재난망 할당 계획을 변경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12일 관계 당국에 따르면 최근 열린 비공개로 진행된 국회 간담회에서 정부는 사업 추진이 시급한 재난망에 700㎒ 대역의 718~728㎒(상향), 773~783㎒(하향)를 우선 할당하고, 잔여 대역 용도는 내년 상반기까지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인접국과 간섭을 피하고 통신 상용부품 사용이 가능해 재난용 장비와 단말을 적기에 경제적으로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송사는 미국식 재난망 분배 방식인 758~768㎒(하향), 788~798㎒(상향)를 주장했다. 재난망 구축 용이성을 표면적 이유로 내세웠다. 하지만 속내는 다른 데 있다는 게 학계와 통신 업계의 분석이다. 정부 원안대로 재난망 주파수가 할당되면 보호 대역을 고려할 때 방송사가 주장하는 9개 채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통신사 한 관계자는 “정부 원안대로 가면 채널을 2개 정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방식을 주장하는 것”이라며 “결국 700㎒ 대역에서 통신은 아예 배제한 채 UHD 방송에 유리한 주파수 할당 방안만을 내세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방송사가 제안한 미국식 재난망 분배 방식은 일본과 전파 간섭 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 이미 1990년대 간섭 현상이 발생해 국가 간 조정이 이뤄졌다. 동·남해안 지역에 재난이 발생하면 일본에 ‘이동통신 시스템 잠시 꺼 달라’고 요청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재난망은 철도와 해양 통합망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이런 위험성은 더 커진다.
정치권은 한발 더 나아가 재난망의 상·하향 주파수를 반대로 배치하거나 주파수 간 이격거리를 최대한 멀리 하는 방식도 제안했다. 두 방식 모두 간섭 현상은 해결되지만 주파수 분배가 국제 표준과 달라진다. 정부 원안보다 개발기간과 비용이 많이 소요돼 핵심 부품 확보가 곤란하고 단말과 장비의 적기 확보가 어렵다는 지적이다.
이 두 방식 역시 UHD 방송의 9개 채널 54㎒와 보호 대역을 고려한 방식이다. 통신에 40㎒ 폭을 할당한 기존 모바일 광개토플랜2.0을 무력화하고, 700㎒ 대역을 재난과 방송이 사용하는 ‘광개토플랜3.0(가칭)’을 추진하는 게 궁극적 목적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지난 11일 열린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공청회는 방송사와 정치권의 이 같은 요구를 확인하는 자리로 끝났다. 일방적 방송 편들기로 공공과 통신, 방송이 공존할 수 있는 창조적인 논의는 전혀 이뤄지지 못했다. 700㎒ 주파수의 재난망 분배는 언제 결정될지 기약이 없게 됐다.
안전행정부는 재난망 구축 추진일정을 고려해 11월 중순까지 조속히 분배 방안을 확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주파수가 확정되지 않으면 장비 업체 개발에 차질이 생겨 내년 시범사업의 정상 추진을 장담할 수 없다. ‘재난망 우선’이라는 형식적인 공감대만 형성됐을 뿐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는 비난이 커지고 있다.
안호천기자 hca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