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은 국제 사회의 약속이다. 정보통신 산업에서 표준이 지켜지지 않으면 각종 정보의 생산과 이용이 효율적으로 이뤄질 수 없다. 막대한 추가 비용도 발생한다. 초고화질(UHD) 방송도 마찬가지다. 표준을 준수해야만 국제 공조와 산업 활성화를 유도할 수 있다.
UHD 방송의 국제 표준은 아직 논의 중이며 적지않은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표준이 제정되기까지는 3년 이상의 기간이 필요하다. 한 기업이나 국가가 만드는 게 아니라 여러 기업과 기관, 단체가 모여서 만들기 때문이다.
업계는 UHD 방송 표준이 제정되기까지 전국방송을 도입하는 것은 무리라고 지적한다. 과거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의 다양한 ‘갈라파고스’ 사례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좀 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표준, 한 번 정하면 20년 써야
휴대 단말 디스플레이의 고화질 수용, 스크린 상호 간 연동서비스, 개인 맞춤형 콘텐츠, 재난상황 대비 등의 요구가 커지면서 차세대 방송 기술이 주목받고 있다. 차세대 방송은 네트워크 측면에서 잡음에 강하면서도 주파수를 효율적이고 유연하게 사용해야 한다.
서비스 측면에서는 UHD방송뿐만 아니라 모바일 HD방송, 방통융합 서비스, 개인 맞춤형 서비스와 광고, 긴급경보방송, 실감오디오 등을 제공해야 한다. UHD 방송을 위한 새로운 주파수와 표준 제정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방송사가 제공한 방송 서비스를 시청자가 상용수신기로 이용하려면 프로그램 제작자, 방송사, 방송장비 개발자, 수신기 제조사 등 관련 주체 간 방송표준이 필요하다. 방송표준은 TV 내장이 이뤄지기 때문에 한 번 결정하면 10~20년 이상 장기적으로 써야 한다. 변경이 곤란하기 때문에 신중한 결정이 필요하다.
표준을 변경할 때엔 TV를 교체하거나 셋톱박스를 지원해야 한다. 제조사의 생산시설 변경과 방송사의 송신장비 교체 등 막대한 추가 비용이 들어간다.
과거 지상파 DTV 도입 시 방송표준을 마련하는 데도 약 4년이 걸렸다. 정부는 1997년 2월 디지털전환 기본방침을 확정했다. 이후 산학연 전문가 협의회를 거쳐 미국 방식(ATSC)을 건의했고 그해 말 최종 확정됐다. 이듬해 기술기준이 개정됐지만 TTA의 지상파 DTV 방송 송수신정합 표준은 2000년 말에야 제정됐다.
◇국제 표준 동향 살펴보고 서비스 시작해야
최근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TTA)는 표준총회를 열고 지상파 UHD TV방송 송수신 정합 안건을 잠정표준으로 채택했다. 잠정표준은 기술발전 추세 등의 확인에 시간이 필요할 때 일시 적용하는 표준이다. 1년 동안만 유효하며 이후엔 표준승인, 기간연장, 폐지 등을 결정해야 한다.
그동안 UHD 방송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던 표준 제정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온 지상파 방송 진영은 반발했다. ‘통신 마피아가 결정한 통신 카르텔’을 운운하며 700㎒ 주파수를 획득하기 위한 계략이라고 비판했다. 우리나라가 국제 표준을 선도해야 하는데 잠정표준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UHD와 관련한 국제 표준은 정해진 것이 하나도 없다. 현재 지상파 방송사가 시험방송에 사용하는 기술은 2009년 제정된 유럽식 표준(DVB-T2)에 압축률을 높인 고효율압축코딩(HEVC)을 추가한 1단계 표준이다. DVB-T2는 재난방송이 불가능하고 IP(방통융합) 지원, 이동수신을 위한 상용장비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럽방송연합(EBU) 기술위원회는 지난 7월 “1단계 표준은 화소수만 증가한 것으로 성공적인 UHD 서비스를 추진하기에는 미흡하다”며 “프레임 수, 명암비, 음향 등 종합적 요소를 고려한 새로운 표준제정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미국 지상파방송 표준화 단체인 ATSC는 지상파 UHD와 모바일 HD가 가능한 새로운 표준(ATSC3.0)을 논의하고 있다. 내년 말 제정 목표로 현재는 기반기술 검증 단계다. 향후 유럽식 표준과 미국식 표준을 중심으로 국제 표준화가 이뤄질 것이라는 게 업계 전망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미국 표준 초안이 내년 3~4월 나오고 연말이면 결정될 것”이라며 “하지만 향후 국제 표준이 어떤 방향으로 결정될지, 우리가 어떤 표준을 따라야 할지 아무것도 결정된 게 없다”고 말했다.
◇먼저 갔다가 뒤처질 수 있다
ICT 업계는 현시점에서 제정하는 표준은 향후 세계적으로 본격적인 UHD TV 시장이 열릴 때 시대에 뒤떨어진 표준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현재 사용되는 표준은 UHD 표준 서비스에 부적합하기 때문에 미래에도 통용될 수 있는 표준을 계속 논의해나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업계 관계자는 “화소 수 증가만으로 UHD TV라고 하는 것은 일반인의 혼동을 초래할 수 있다”며 “현재 다양한 표준 논의가 진행 중인데 유럽도 UHD TV 로드맵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충고했다.
표준을 따르지 않고 독자 노선을 택했다가 낭패를 본 사례는 과거에도 많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일본의 통신 표준인 PDC다. 과거 GSM이 유럽 등 대부분 국가에서 표준으로 채택되자 PDC는 외톨이 신세로 전락했다. 일본은 휴대폰 가격의 5~10%라는 막대한 로열티를 지불하고 GSM 기술을 도입해야 했다.
우리나라가 먼저 지상파 UHD 전국방송을 시작하면 이 같은 상황에 몰릴 수도 있다. 무엇보다 700㎒ 주파수 확보의 목적으로 성급하게 서비스를 시작해서는 안 된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홍인기 경희대 전자전파공학과 교수는 최근 열린 700㎒ 관련 공청회에서 “세계적으로 지상파 UHD를 개시하겠다는 국가는 하나도 없으며 국제 표준도 논의 중이어서 지상파 방송 진화가 어떻게 전개될지 불확실하다”며 “글로벌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 UHD 전면 전환을 추진하면 가장 먼저 도입하고도 가장 뒤처진 기술로 서비스하는 국가로 전락할 수 있다”고 충고했다.
안호천기자 hca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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