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텔레콤의 양자난수생성기(Quantum Random Number Generator·QRNG) 칩화는 양자암호통신 대중화 측면에서 획기적 시도로 평가된다. 통신 경쟁 포인트가 속도에서 보안으로 넘어가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작고 저렴한 칩으로 양자난수를 생성, 슈퍼컴퓨터로도 뚫리지 않는 완벽한 보안체계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군사·보안 용도로만 사용되던 기술을 일반인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기점이 될 전망이다. 기존의 불완전한 통신보안 체계를 대체, 통신산업 전반에 혁신적 변화를 몰고올 것으로 예상됐다.
양자난수는 현재 사용되는 ‘의사난수(Pseudo Random Number)’의 단점을 메울 거의 유일한 대안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지금의 통신보안 체계는 난수(Random Number), 즉 무작위로 만든 숫자에 의존한다. 거의 무한대로 긴 무작위 숫자를 만들어 이를 암호화에 활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인위적으로(의사난수) 만들기 때문에 오래 관찰하면 패턴을 읽을 수 있다. 통신 도·감청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에드워드 스노든 전 미국중앙정보국(CIA) 요원의 국가안보국(NSA) 도청 폭로가 결정적 증거다.
한동국 국민대 수학과 교수는 “구식 펌프를 난수생성기라고 한다면 길어낸 물이 난수”라면서 “그러나 반드시 처음 한 바가지 마중물을 넣어야 하기 때문에 패턴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양자난수는 △예측이 불가능할 것 △이전 숫자와 새로운 숫자 간 상관관계가 없을 것 △숫자가 편향되지 않을 것이라는 ‘순수난수(True Random Number)’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물리적 현상의 관측값을 숫자로 변환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특히 10나노미터(nm·10억분의 1미터) 이하 크기에서 일어나는 양자역학적 현상을 활용한다. 전기 저항값 변화를 측정하거나, 디지털 카메라에서 빛이 전자로 변환된 것을 측정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SK텔레콤과 공동연구를 진행하게 될 스위스 제네바대 연구팀이 제안한 방법이 바로 디지털 카메라로 빛을 촬영하는 방식이다.
안도열 서울시립대 전자전기컴퓨터공학과 교수는 “실제로 미국 NSA는 오랜 시간 통신 내용을 관찰해 의사난수 패턴을 파악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면서 “양자난수생성기로 만든 순수난수는 슈퍼컴퓨터로도 뚫을 수 없는 완전한 보안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양자난수생성기는 군사나 보안 목적으로 상용화됐으나 일반인이 사용하기에는 크기가 크고(손바닥 크기) 가격이 개당 1500달러(약 165만원)로 비싼 게 단점이었다. SK텔레콤이 이를 칩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크기와 가격이 크게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 이 회사는 손톱 만한 크기에 1달러 미만인 칩을 만들 계획이다. 양자암호통신의 대중화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SK텔레콤은 이미 상당한 수준의 자체 양자암호통신 기술을 확보했다. 지난 10월 부산에서 열린 월드IT쇼에서 시연회를 열었을 정도다. 이 같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SK텔레콤은 양자난수생성기 칩화에 속도를 낼 방침이다. 연내 스위스 제네바대 및 IDQ사와 업무협약을 맺고 공동연구를 진행한다. 국내외 팹리스 업체에 반도체 설계를 의뢰하기로 했다. 내년 하반기 이를 적용한 스마트폰 시제품을 내놓을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상품성이 확인되면 SK하이닉스를 통한 칩 대량생산도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양자난수생성기 칩화가 성공하면 통신산업 전반에 대대적인 변화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동통신과 사물인터넷(IoT), 금융, 스마트그리드, 스마트가전 등 적용가능성이 무한하기 때문이다. 이들 개별 기기에 일제히 칩이 탑재되는 것을 가정하면 막대한 시장이 새로 생기는 셈이다. 세계 사물인터넷 시장 규모는 지난해 약 2000억달러에서 2022년 1조2000억달러로 성장할 전망이다. 이에 따라 양자컴퓨터를 포함한 양자암호통신 시장 규모도 2015년 33억달러에서 2020년 54억7000만달러로 연평균 10% 이상 급성장할 것으로 예상됐다.
한동국 교수는 “사물인터넷 등이 확산될수록 양자난수생성기 같은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원천기술을 확보한다면 우리나라가 차세대 보안솔루션 기술주도권을 쥘 수 있다”면서 “아직까지 연구실 바깥에서 상용화한 전례가 없기 때문에 누가 먼저 만들어내느냐가 국가적 차원에서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양자난수생성 기술이 보다 더 완벽한 통신보안체계가 되기 위해서는 통신 네트워크에 양자기술을 접목한 양자암호통신 기술과 결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SK텔레콤은 양자 암호키 분배(QKD) 등 관련 장비를 국산화하고 네트워크 차원의 양자암호통신 상용화에도 박차를 가할 방침이다.
안도열 교수는 “양자난수생성기 칩화는 진정한 양자암호통신 구현으로 가기 위한 중간 교두보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면서 “양자컴퓨터가 10~20년 내에 상용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그 전에 양자암호통신 상용화 작업을 마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용주기자 kyj@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