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의 국정기조인 ‘창조경제’가 출범 2년차를 맞이하면서 구체적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대기업들이 지역별 거점센터를 운영하며 아이디어와 창업을 적극 돕기 시작했고, 정부 출연연구소들은 중소기업 애로사항 해결에 앞장서고 있다. 우리나라를 둘러싼 경제지표나 전망이 썩 밝지 않은 상황에서도 미래 먹거리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여전히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최근 화두는 단연 ‘히든챔피언’ 육성이다. ‘독일의 피터 드러커’로 불리는 헤르만 지몬 박사가 2005년 주창한 히든챔피언은 ‘강소기업’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지몬 박사는 히든챔피언을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기업, 각 분야에서 세계시장 점유율 1~3위 또는 소속 대륙에서 1위를 차지하는 기업, 매출액이 40억달러 이하인 기업’으로 정의했다. 지난해 기준으로 이 조건에 맞는 전 세계 히든챔피언 2734개 중 1307개가 독일 기업이다. 우리나라는 23개로 13위로 평가됐다.
히든챔피언은 기존 한국적 사고로는 이해하기 힘든 존재다. ‘히든챔피언의 천국’인 독일의 경우 100년 넘게 성장해 온 히든챔피언들이 숱하게 많지만, 대기업으로 발전한 경우는 드물다. 반면 한국은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기업이 일정 수준 이상 커지면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문화다. 독일 기업인 또는 독일 정부 관계자들과 얘기를 해보면 그 이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들이 나온다. 독일 기업들은 마이스터로 대표되는 ‘장인정신’을 중시한다. 성장보다는 완성도에 치중한다. 그 분야에서 최고에 오르면, 기술과 품질을 더 갈고 닦아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경제학자들에 따르면 실제로 독일 히든챔피언 중 대기업으로 성장한 사례는 음향기기 제조업체 젠하이저나 기계업체 보쉬 정도에 불과하다. 그나마 이들 역시 기업규모가 클 뿐 원래의 영역을 벗어났다고 할 수 없는 기업 활동을 하고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정부가 이 같은 독일과 한국의 차이를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정부가 내놓은 ‘한국형 히든챔피언 육성 대책’을 보면 세계시장 점유율 1~3위, 매출액 100억원 이상인 중소·중견기업일 것,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 투자 2% 이상, 매출액 대비 수출비중 20% 이상, 매출액 대비 인건비 비중이 업종 평균 이상, 대기업 납품비중이 50% 미만일 것 등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지몬 박사의 히든챔피언 정의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실제 한국적 경제구조를 상당부분 반영하고 있다.
해외 사례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한국사회가 수십 년간 반복해온 실패를 답습하는 일이다. ‘강남의 귤을 강북으로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귤화위지·橘化爲枳)’는 중국 속담처럼 역사도 문화도 다른 외국의 정책이나 성공사례가 한국에서 원래 모습대로 잘 정착될 리 없다. 한국사회가 외국과 다른 이상, 정책을 위해 삶의 방식까지 모두 바꾸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철저한 한국화는 히든챔피언 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성공의 선결조건일 것이다. 제도 개선, 지원·육성책 등 다양한 정책이 한국형 히든챔피언을 만들기 위해 시도되겠지만 첫술에 배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지속적으로 한국에 맞게 고쳐나가고 보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다만 지향하는 바만 잊지 않았으면 한다. 독일 기업의 99.5%는 중소기업이고 법인세의 55%를 낸다. 반면 한국은 중소기업이 99%를 차지하지만 법인세 부담은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어느 쪽이 건전한 경제구조인지, 왜 한국이 히든챔피언을 육성해야 하는지는 명확하다.
이부섭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bslee@kof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