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아틸라 더 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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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디코는 계속 조잘거렸다. 무슨 이야기가 그리도 많은지 쉬지도 않았다. 아틸라는 웬일이지 열심히 들었다. 아마 그의 전장에서의 치열한 삶에서 전혀 경험한 적 없는 포근한 순간이었다.
아틸라는 그랬다. 그가 죽일 수 밖에 없었던 벙어리 힐다가 자기에게 비로소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서로 대화라고는 나눠본 적이 없는 아틸라와 힐다의 사랑, 시도때도 없이 자꾸 명멸하던 안타까운 사랑, 그 아픈 사랑에 힐디코는 절정을 찍고 있었다. 아틸라는 힐디코의 자질구레한 이야기에 푹 빠져서 그녀의 손까지 꼬옥 잡고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손을 잡고 있었는지 손에 땀이 흥건했고 서로의 손이 자꾸 미끄러졌지만 서로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꿈인가 싶다.”
아틸라는 뜬금없었다. 소년처럼 얼굴이 빨개졌다.
“누가 나에게 이렇게 오래오래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었다.”
“왜요? 제왕님은 친구가 없으십니까?”
“친구? 전장의 친구는 있어도...이야기 친구는 없었다.”
“사랑하는 여인도 없으셨습니까?”
아틸라는 순간 입을 닫았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고, 아틸라에게 힐다를 떠올린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금기를 깨트리는 것이었다. 힐다는 아틸라의 실라였다. 어머니의 나라였다. 힐디코는 아틸라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빤히 보았다.
“내 손으로 죽였다.”
힐디코는 흠칫했다. 무서운지 뒤로 슬쩍 물러났다.
“저도 죽이실겁니까? 제왕님...”
힐디코는 작은새처럼 떨고있었다.
“아니...내가 너를 죽이는 일을 없을 것이다. 이제...”
“그럼 다른 사람이 저를 죽일 수 있습니까?”
아틸라는 힐디코의 어깨를 강하게 잡아챘다.
“내가 죽으면 너도 죽는 것이다. 내가 죽지않으면 너도 죽지 않는다.”
힐디코가 목이 타는지 음료를 마시려했다.
“아까는 거의 마시지 못했습니다. 사실, 너무 긴장했습니다.”
아틸라가 크게 허허 웃었다. 아틸라가 웃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는 웃음이 없는 남자였다. 아무도 아틸라가 웃는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아틸라가 웃었다. 그에게 지금은 낙원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힐디코가 음료를 벌컥벌컥 마셨다. 아틸라가 그녀에게 음료를 빼앗아 단숨에 들이켰다. 아틸라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 작은새를 보듬었다.
“이제 우리는 헤어질 수 없다.”
에첼은 눈을 떴다. 사방이 캄캄했다. 주변 바닥은 그녀가 흘린 피로 흥건했고 피냄새가 토악질을 일으켰다. 그녀가 자신의 배를 만져보았다. 음부를 만져보았다. 신기하게도 피가 없었다. 아, 그녀의 아이가 죽지 않은 것이다. 에첼은 눈물을 흘렀다.
“이 아이는 살아날 것이다.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이 아인 죽음도 물리칠 아이다.”
에첼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러나 일어날 수 없었다. 자꾸 엎어졌다. 에첼은 겨우겨우 앉았다. 그녀는 앉은 채로 한 쪽 팔을 땅바닥에 의지한 채 기어가기 시작했다. 속도는 물론 느렸지만 쉼없이 기어갔다. 도중에 힘이 들어 잠시 숨을 고르고 하늘을 보았다. 앗, 별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
에첼은 불길한 예감에 몸서리를 쳤다. 소름이 돋았다.
“안돼...안돼...”
에첼은 갑자기 쏟아지는 눈물을 혼자 감당하기 어려웠다.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무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그녀는 손톱으로 땅바닥을 긁으며 울었다.
“아틸라...아틸라...”
에첼은 울면서 다시 기어가기 시작했다. 딱딱한 땅바닥은 에펠의 팔꿈치를 갉아먹었다. 에첼의 팔꿈치는 엉망이었고 피칠갑이였다. 저만치 아틸라 진영이 밝은 횃불로 타오르고 있었다. 아틸라의 결혼식 날이라 모두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위험하고 뻔뻔한 그러나 강인한 훈의 전사들을 술판을 벌였고 그들의 욕망을 해소할 여자들도 충분했다. 에첼은 눈물 범벅, 피 범벅이 되어 기었다. 그녀의 배가 점점 땅바닥에 닿아 끌렸지만 에첼은 멈추지 않았다. 에첼의 사명이었다.
에첼은 태어나면서부터 또 하나의 아틸라였을 것이다. 회색빛과 호박색빛의 각각 다른 눈동자를 가진, 연지산(燕支山) 홍화처럼 아련한 미소를 가진, 고달픈 정염이 넘실거리는 에첼은 그렇게 아틸라였을 것이다. 에첼은 자신의 정체성과 그 정체성을 완성시킬 운명을 살리기 위해 멈추지 않았다. 별은 빠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곧 어떤 운명과 충돌할 듯 했다. 그 운명의 원형(原形)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글 소설가 하지윤 lif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