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회항 사건을 보면서 그 회사에 관료주의가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관료주의란 무엇인지 좀 찾아 봤다. 관료주의란 관료사회에 만연해 있는 독선적, 형식적, 획일적, 억압적, 비민주적 행동양식이나 사고방식을 말한다고 정의돼 있다. 이런 관료주의의 몇 가지 징후들이 있는데 △부서 간 협업이 안 되고 △윗사람에게는 인사를 잘하지만 아랫사람에게는 명령을 잘 한다. 또 △항상 매뉴얼대로만 따라하고 △연공서열을 중시하며 △파벌이 형성된다. 아울러 △형식주의가 만연하고 △상사의 의전에 치중하게 된다.
관료주의란 말은 본래 관료사회에서 나왔지만 유사 이래 인간이 만든 모든 조직에는 관료주의가 어느 정도 있다고 봐야 한다. 단기간에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피라미드식으로 잘 조직된 관료조직만큼 효율적인 것이 없다. 문제는 시대가 변해 대학 중퇴자들이나 사회 변두리에서 놀던 창업자들이 주류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가고 있는 다양화, 분권화, 투명화된 사회에서 이 관료주의가 설 땅이 없게 된 점이다.
조직이 커지면 관리 사각지대가 생기고 급하게 성장하는 과정에서 생각이 다른 직원들이 여기저기 끼어들어 독버섯처럼 기생하게 된다. 이런 직원들은 자기 업무를 스스로 신성시하고 자기 업무 영역을 확정한 뒤에 참호를 파고 들어가서 사주경계만 하게 된다. 조직에서 한 명이 이런 ‘갑질’을 시작하면 주위의 조직원들이 서로 자기 영역을 정해 참호를 파기 시작한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조직원들이 무척 바쁘고 열심히 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회사나 조직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업무 영역의 참호 보수공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직 곳곳에서 이런 사람들이 업무의 흐름을 막게 되면 회사가 되는 일이 없다는 자조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기 시작한다.
조직이 커지면서 잠깐 한눈팔면 관료주의가 순식간에 퍼지는 것은 관료주의가 굳어지면 내부 조직원들이 서로 경쟁할 필요가 없고 또 사고만 안 치면 오래 근무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단단한 관료주의라는 참호 속으로 들어가 있으면 포탄이 날아와도 다칠 염려가 없다. 그러니 상사에게 깨질 때에도 속으로는 누가 회사 오래 다니나 보자 하면서 참고 견딘다. 이런 조직에 연공서열이 자리를 잡으면 관료주의가 온전하게 정착됐다고 봐야 한다. 일 열심히 해봐야 남보다 빠르게 진급하는 것도 아니다. 일 안 해도 연한이 차면 진급한다. 그러니 굳이 잘하려고 설치다가 사고 치지 말자는 현상유지 분위기가 조직을 지배하게 된다. 이 현상유지, 복지부동의 분위기 위에 관료주의라는 독버섯이 쑥쑥 자라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최고경영자들은 자기들 조직이 관료주의에 찌들어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회사 내부에서 커온 최고경영자는 회사의 오래된 문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히 바꿀 생각을 못한다. 외부에서 온 최고경영자는 관료주의가 만연해 있다는 것을 직감하면서 쉽지 않은 전쟁이라는 것도 금방 안다. 그래서 어떤 최고경영자는 선두에 서서 무자비한 인사조치, 직원들을 마구 섞어서 벽 없는 조직도 만들어 보고, 직급도 파괴하고, 격의 없는 대화를 한다고 주기적으로 직원들과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료주의를 타파하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 성공한 사례는 많지 않다. 그것은 조직 내에서의 권위주의 시발점이 최고경영자 자신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관료주의를 없애자고 하면서 자기 스스로는 너무나도 독선적, 형식적, 획일적, 억압적, 비민주적으로 행동하고 사고하기 때문이다. 자기 리더십이 조직의 관료주의를 오히려 조장하고 있지는 않은지 주의 깊게 살펴보고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 최고경영자 스스로가 넓은 사무실에 최고급 차량과 의전·형식주의에 안주하면서, 사장이니까 당연히 이런 정도의 대우는 받아야지 하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조직원들이 직위 따라, 부서 끗발 따라 자기 몫을, 자기 영역을 챙기고 조직이 화석화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페이스북 창업자는 사무실도 없이 동료들과 같이 서로 책상을 맞대고 일하고 있다. 스티브 잡스는 청바지에 검정 티셔츠가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월마트의 샘 월턴은 20년 넘는 픽업을 타고 다니고 세계 어디를 가든 이코노미를 탔다. 블룸버그 뉴욕시장의 방은 세 평이 안 된다. H은행의 K지주 회장은 상무 때 쓰던 책상을 20년째 쓰고 있다. 소셜커머스 업체 K사장은 하루에 16시간씩 일하고 있다. 수조달러의 카드사 회장이 운동복에 배낭 메고 혼자서 출장 다니고 있다.
성공한 기업들의 최고경영자들은 한결같이 스스로 솔선수범한다. 백 마디 말보다 행동 하나가 훨씬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조직 운영에서 난치병에 가까운 관료주의는 최고경영자의 생각과 마음가짐에서 시작한다. 땅콩 사건도 재수 없이 터지고 알려진 것이 아니라 이미 최고경영자의 마음속에서 사건의 씨앗이 싹 텄고 조직 내에 만연해 있던 관료주의가 사건을 크게 키운 것이다. 결과적으로 자업자득이다.
CIO포럼 회장 ktlee77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