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그래픽(CG)의 발전은 영화, 드라마 등 대중매체의 배경을 무한대로 늘렸다. 지구에 없는 공간, 상상의 존재 등을 화면에 그리며 소재와 스토리텔링에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부여했다.
CG는 이제 사람의 눈으로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술적 발전을 이뤄냈다. 사실 우리 머릿속에 CG를 본격적으로 활용한 사례로 각인된 ‘쥬라기공원(1993년)’만해도 근접 촬영에는 정교한 로봇을 사용하고 시나리오에서 어두운 상황을 설정해 CG의 어색함을 최대한 줄이려 했다.
쥬라기공원보다 앞서 1991년 개봉된 ‘터미네이터2’ 역시 액체형 로봇 T-1000을 CG로 만들어내는 등 컴퓨팅 기술을 본격적으로 사용했지만 아날로그 방식으로 연출한 분량이 훨씬 많았다. CG는 일종의 보조재였던 셈이다.
CG는 곧 영화제작에 없어서는 안 되는 ‘주연’으로 부상했다. ‘아바타’를 거쳐 최근 마지막편 ‘호빗:다섯군대의 전투’를 개봉한 ‘호빗’ 시리즈는 대부분의 장면이 CG다. 실내 공간 등 디테일 깊은 장면을 비롯해 대규모 전투, 오크 등은 컴퓨터에 힘입어 탄생했다.
호빗은 전편격인 ‘반지의 제왕’ 시리즈보다 스케일이 작은 원작이었지만 CG를 이용해 풍부한 볼거리가 보태지며 적지 않은 화제를 만들었다. 여기에 3D, 4DX 등 새로 등장한 관람방식은 영화 몰입감을 한층 높여줬다.
호빗 시리즈가 이처럼 과감하게 CG의 힘을 빌릴 수 있었던 것은 ‘HFR 3D(HIGH FRAME RATE 3D)’ 덕분이다. 기존 3D보다 초당 프레임수를 갑절 늘린 이 기술은 ‘호빗’ 시리즈에서 영화에 처음 적용됐다.
CG의 발전이 거듭될수록 이를 거부하는 현상도 나타난다. 컴퓨터의 힘을 빌리되 지배당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꿈틀댄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대표적이다. 이 감독은 ‘다크나이트(C-130 하이재킹)’ ‘인셉션(360도 복도회전)’ 등에서 관객이 당연히 CG로 연출했을 것이라 생각한 장면을 모두 아날로그 방식으로 만들어냈다.
놀란은 ‘인터스텔라’에 이르러서는 급기야 옥수수밭을 연출하려 수만평 대지를 사서 3년동안 옥수수를 길렀다.
사실 CG로 뒤덮인 호빗 시리즈도 이 같은 저항에 부딪혔다. ‘간달프’ 역을 맡은 배우 이언 맥켈런은 호빗과 마법사의 설정상 키 차이 때문에 상대배우 없이 혼자 연기하는 것에 불만을 느꼈다고 한다.
맥캘런은 “이건 내가 배우가 되고 싶었던 이유가 아니야(This is not why I became an actor)”라며 배우 인생에 회의감까지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작진은 결국 일부 장면에서 CG를 쓰는 대신 난쟁이 대역 배우에 실리콘 가면을 씌워 촬영하는 것으로 타협했다고 한다. 터미네이터가 예견한 컴퓨터와 인간의 대립은 이미 시작된 것이 아닐까.
김시소기자 sis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