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금융의 무리한 확대로 속칭 ‘물량 빼기’가 횡행하고 있어 기술 평가 부실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기술신용기관(TCB)의 졸속 부실 심사 우려도 제기되면서 기술금융 지원이 좀비기업 양산 관문으로 악용되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물량 빼기란 은행과 TCB사가 정부 기술금융 확대 주문에 편승해 부실기업까지 기술금융에 포함시키고 기술 심사를 속성으로 진행해 달성 목표를 채우는 것을 의미한다. 기술심사를 요청하는 기업수가 급증하면서 심사 대기시간만 한달 이상 소요되는 등 심사 적체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7일 금융권에 따르면 정부의 무리한 기술금융 확대에 TCB심사 부실화로 좀비기업이 대거 양산될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실적 맞추기에 급급한 은행권도 담보대출이 가능한 기업을 기술금융 적합 기업으로 둔갑시키는 등 도덕적 해이가 극에 달하고 있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TCB사에서 심사 수익료를 높이기 위해 기술 평가서를 속성으로 만들거나 제대로 된 기술 평가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아 기술 평가서가 엉터리인 경우가 많다”며 “민간 TCB사의 경우 전문 심사인력 부족 등으로 인해 기업 대상 기술 심사 기간이 예전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나는 등 애꿎은 우량 기업들만 피해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무리하게 기술금융 양적 확대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기술 심사와 인프라는 오히려 뒷걸음질 치는 역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최근 기술심사를 요청한 한 기업 대표는 “기술 심사 기간에 맞춰 자금 계획을 다 세웠는데, 두 달째 심사 결과 연락을 받지 못했다”며 “대기 중인 기업들이 많아 그냥 기다리라고만 했다”고 성토했다.
무엇보다 TCB사의 기술 심사 부실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기업 수요가 대거 몰리면서 전문적으로 심사할 수 있는 전문 인력과 인프라가 취약해 기술평가 자체가 ‘수박 겉핥기’식으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전 TCB평가기관 담당자는 “제대로 된 기술 심사보다는 건당 평가료를 받는데 TCB사는 초점을 맞춘다”며 “빨리 기술 평가서를 만들어야 수익이 늘어나기 때문에 속성으로 기술 평가가 이뤄지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이어 “정부의 기술금융 확대 주문에 맞춰 실적 경쟁이 벌어지자 편법으로 담보를 보유한 기업 위주로 대출을 해주는 경우도 상당수”라고 밝혔다.
기술 금융 수요는 급증하지만 기술 평가 품질은 악화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금융센터 관계자는 “현재의 기술평가 방식은 신용평가와 차별화된 기술평가로서 신뢰성을 갖기 어렵다”며 “기술평가 수준이 향상되지 않은 현 상황에서 무리하게 은행권 대출을 강요하는 형태로 기술금융 확대를 유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서병호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기술금융의 경쟁적 취급은 돈을 빌린 사람의 도덕적 해이를 불러 일으키고 은행의 대손비용 급증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길재식기자 osolgil@etnews.com
-
길재식 기자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