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3년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업무보고는 어느 해보다 많은 관심을 받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부터 강조한 ‘경제민주화’의 구체적인 방향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공정위는 업무보고에서 ‘대기업집단 폐해 시정’을 전면에 내세웠다.
대기업집단 폐해 시정은 △총수일가 사익편취 근절 △신규 순환출자 금지 △지주회사 규제 개편 △금융 보험사 의결권 제한 강화의 세부 과제로 구성했다. 하나하나가 모두 쉽지 않은 숙제였지만 공정위는 비교적 빠른 속도로 입법 과제를 완료해 나갔다. 특히 핵심 과제였던 총수일가 사익편취 근절을 위한 일감 몰아주기 규제, 신규 순환출자 금지 관련 법안 등이 통과되면서 공정위 내에서도 “대단한 성과”라는 평가가 나왔다.
입법 과제는 마무리했지만 ‘본경기’는 이제부터다. 일감 몰아주기 규제는 작년 초 발효됐지만 기존 거래는 1년 동안 유예기간을 부여한 만큼 오는 14일부터 본격적인 감시와 제재가 이뤄질 전망이다.
◇총수 일가 배불리던 일감 몰아주기, 법으로 막는다
그동안 많은 대기업이 합리적 고려 없이 계열사에 일감을 몰아줘 크게 질타를 받았다. 일감 몰아주기는 비계열 중소기업의 사업 기회를 박탈해 공정한 시장경쟁을 저해한다. 또한 대기업 계열사가 별다른 노력 없이 얻은 이익은 배당 등의 과정을 거쳐 결국 총수 일가 배를 불리는 결과로 이어진다.
대표적인 사례가 MRO(Maintenance, Repair, Operation) 사업이다. MRO는 기업의 제품 생산과 직접 관련된 원자재를 제외한 소모성 자재로, 프린터 종이나 토너 등이 대표적이다. 국내 MRO 시장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2013년 기준 약 25조원에 달하지만 그동안 대기업 계열사가 독식해 경쟁력 있는 중소기업의 사업을 저해했다.
공정위는 총수일가 사익편취를 막고 중소기업의 정당한 사업 기회 확보를 돕기 위해 일감 몰아주기 규제에 나섰다. 개정 공정거래법은 2013년 7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고, 공정위는 연말까지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법 시행은 작년 2월 14일 시행됐지만 기존 거래는 1년 동안 유예기간을 둬 사실상 오는 14일부터 본격적인 법 적용이 시작되는 것이다.
법이 적용되는 기업집단은 자산총액 5조원 이상의 총수가 있는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이다. 이들 기업집단의 총수일가 지분이 30%(비상장사는 20%) 이상을 유지한 상태에서 계열사 간 부당한 내부거래 규모가 12% 이상이거나 200억원 이상일 때 과징금을 물릴 수 있다. 2014년 4월 기준 여기에 해당되는 기업집단은 총 39개다.
공정위는 부당한 이익제공 금지행위 세부유형과 기준으로 △상당히 유리한 조건의 거래 △사업기회의 제공 △합리적 고려나 비교과정 없는 상당한 규모의 거래를 제시했다. ‘상당히 유리한 조건의 거래’로는 자금·자산·상품·용역 등을 정상가격보다 상당히 높거나 낮은 대가로 제공하는 행위로 규정했는데, 정상가격과 차이가 7% 미만이고 연간거래 총액이 일정금액 미만일 때에는 적용에서 제외했다.
‘합리적 고려나 비교과정 없는 상당한 규모의 거래’는 거래 상대방을 선정하는 적합한 과정 없이 상당한 규모로 거래하는 행위로 규정했다. 거래 총액이 거래 상대방 매출액의 12% 미만이고, 200억원 미만이면 적용대상에서 제외한다. 비율 기준은 대기업 집단 평균 내부거래비중이 12%인 점을 감안했고, 금액은 공정거래법상 대기업 집단 부당지원감시를 위한 내부거래공시대상 거래규모(분기별 50억원, 연간 200억원 수준)를 고려했다. 거래규모 기준을 초과하더라도 효율·보안·긴급성이 요구될 때에는 예외로 인정받을 수 있다.
◇부족한 감시 인력…법 허점 노리는 대기업
부당한 일감 몰아주기를 막을 수 있는 법이 갖춰졌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실제 대기업 움직임을 감시하고 제재할 수 있는 역량이 뒷받침돼야 법의 실효성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감 몰아주기 규제대상 기업 수는 작년 4월 1일 기준 187개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거래와 계열 변동, 지분 이동, 일부 대기업의 조직적인 편법 행위까지 감시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공정위는 지난해 관련 업무를 수행할 국 단위의 조직 신설을 추진했다. 하지만 행정자치부와 협의가 원만히 진행되지 않아 과 단위의 조직 신설마저도 무산됐다. 현재로서는 조직 신설 재추진보다는 관련 국에 전문가를 배치해 역량을 높인다는 계획이어서 효율적인 감시가 가능할 지 우려 목소리가 나온다.
정재찬 공정위원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시장감시국에 과거 내부거래 등을 다뤄본 베테랑 직원 위주로 배치할 계획”이라고 밝혀 당장 조직 신설은 고려하지 않고 있음을 밝혔다.
정 위원장은 “(조직 확대는) 시간을 두고 계속 노력해야 한다”며 “협의 과정에서 관계부처가 조금 덜 급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고, 급하다는 데에는 공감하지만 인력·조직을 늘리는 것보다 현재 인력으로 최대한 융통성 있게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기업이 법의 허점을 이용해 제재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기업 총수의 친인척 등이 설립해 계열사에서 떨어져나간 ‘친족분리 기업’이 사각지대로 남아있다는 지적이다. 이들은 대기업 계열사에 포함되지 않아 일감 몰아주기 규제 적용을 받지 않는다.
김기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지난해 “내부거래 의존이 높은 데도 친족분리 승인으로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관련 규제를 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제도적 허점”이라며 “내부거래 의존도 등 친족분리 요건을 강화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대기업과 해외 계열사 간 일감 몰아주기는 제재 대상에서 제외되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공정위는 해외 계열사와의 거래 관련 규정을 명확히 하지 않았으며, 현실적인 조사 가능성과 국익 등을 고려했을 때 법 적용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의견을 밝힌 바 있다.
공정위는 올해 대기업 감시와 점검을 한층 강화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대기업집단 계열사 간 대규모 내부거래 시 공시의무 이행 여부를 상·하반기 각각 점검한다. 일감 몰아주기 법 적용 대상 기업의 거래실태를 상시 모니터링하고, 분기별로 관련 교육을 실시할 계획이다.
유선일기자 ys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