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경제 시대에 가장 중요한 덕목이 소통과 융합이라는 화두를 접할 때면 이십대 초반에 읽은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란 책이 떠오르곤 한다.
이데올로기에 별관심이 없거나 요즘 기준으로 비주류에 해당하는 친구들에게 운동권을 공격하는 논리를 제공했던 책 중의 하나가 칼 포퍼가 저술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책의 저자 칼 포퍼는 20세기 과학철학자이자 사상가다. 그는 열린사회와 닫힌사회라는 비유로 나치즘과 마르크시즘 등 전체주의 사상을 비판하고 자유 인본주의를 옹호했다.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 등 위대한 사상가들을 열린사회의 적으로 규정해 통렬히 비판한 점에 놀라면서도 모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했다.
25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이 책에 관심이 가는 것은 요즘들어 강조하고 있는 소통과 융합이 가능한 사회가 진정한 열린사회가 아닐까하는 생각 때문이다. 칼 포퍼가 이야기한 열린사회는 이성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고, 내가 틀리고 당신이 옳을 수 있다는 주장이 통용될 수 있으며, 진리의 독점과 절대적 진리를 거부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다.
그 당시엔 정치 철학적 관점에서 다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사회, 문화, 산업, 경제, 과학기술 등 전 분야를 관통하는 선견지명임을 새삼 깨닫는다. 소통과 융합의 전제 조건은 절대권위와 편견과 오만과 독선이 배제되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인식의 전환이다.
이런 견지에서 열린사회의 적은 무엇일까? 소통과 융합의 걸림돌을 한번 생각해보면, 자기 것에 대한 고집과 집착을 들 수 있다. 근래 유행처럼 융합과 소통을 내세우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십중팔구는 나를 중심에 두고 있다. 소통의 본질은 남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융합 역시 서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무질서해질 뿐 아무 의미가 없다. 합금을 만들 때처럼 여러 가지 금속이 같이 녹아야만 원하는 성질을 띤 새 금속이 만들어지는 법이다. 그게 되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벗겨지는 도금이 될 뿐이다. 나를 버려야 한다. 내가 가진 기득권을 버려야 한다. 스스로 용광로에 뛰어드는 자세가 중요하다.
최근 나온 신조어 중에 ‘NIH(Not Invented Here)’ 신드롬이란 것이 있다. 나 아니면, 우리 조직이 아니면 안 되고 모든 문제를 그 안에서 해결하려는 속성을 일컫는 말이다.
협업에서 흔히 문제가 되는 것이 과연 누가 주체가 될 것이냐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생산자와 판매자, 소재부품과 완성품, 콘텐츠와 시스템 등 가치와 이익이 맞설 때가 많다. 특히, IT 융합을 강조하다보면 IT 융합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돼버릴 때가 있고, 누군가 ‘스쿨버스는 누가 만드나? 학교가 아니라 자동차회사가 만든다’는 볼멘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학교와 자동차회사가 따로 경쟁해선 제대로 된 스쿨버스를 절대로 만들 수 없다. 따라서 스쿨버스 논쟁 자체가 무의미할 뿐이다.
하드웨어(HW) 시대가 가고 소프트웨어(SW) 시대가 왔다고 한다. 하지만 HW 없는 SW는 사상누각처럼 위태롭고, SW가 없는 HW는 알맹이 없는 허상에 불과하다. 서로 인정하고 포용할 때, 새로운 시너지가 생긴다.
정보와 지식이 가치를 창출하는 지식경제 시대에서 창의력에 기반을 둔 이른바 창조경제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창조경제는 열린사회를 토양으로 해 꽃이 피고 열매가 맺을 것이다. 입춘이 막 지났지만 내 몸에 철갑을 두르고서야 어찌 따뜻한 봄바람을 느낄 수 있겠는가?
박상진 한국기계연구원 경영기획본부장 giant@kimm.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