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중순 개봉한 영화 ‘국제시장’이 2월 초 관객 1300만명을 넘었다. 6·25전쟁과 전쟁이 남긴 참담한 현실, 가족을 위해 온몸을 던져 굳세게 살아온 아버지 세대에 대한 희미한 기억의 재조명….
우리는 전쟁의 폐허 위에서 아버지 세대의 피와 땀을 밑거름으로 짧은 기간에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다. 영화는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까지 눈물을 자아내게 하며 가족과 삶의 의미, 그리고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일깨워 줬다.
전후 60여년이 지난 오늘, 경제규모 세계 14위, 무역규모 세계 8위로 발돋움한 우리 경제가 지속 발전을 위해 넘어야 할 과제가 적잖다. 고속성장 과정에서 쌓여온 문제점들도 많다.
반도체·디스플레이, 자동차, 조선 등 우리 주력산업의 빠른 성장 이면에는, 핵심기술과 소재부품 분야 ‘외제 의존’으로 성장의 내실이 크게 잠식돼온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일제, 미제, 독일제 등 ‘외제’ 고부가가치 핵심 소재부품 수입으로 인한 대일역조, 부가가치 유출, 경쟁력 약화는 결코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로 지난 30여년을 풀기 위해 고심해온 숙제다.
이런 우리 소재부품산업이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무역흑자 1079억달러를 달성했다. 그간 우리경제의 취약점으로 꼽히던 소재부품산업이 1997년 처음으로 34억달러 흑자를 실현한 이래, 17년 만에 흑자규모가 30배 이상 증가했다. 무엇보다 그간 만성적이던 대일 적자가 2010년 이후 4년 연속 감소했고, 대일 수입의존도가 18%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어 고무적이다.
지난 2001년 전 세계 유일의 부품소재특별법을 만들고, 14년간 약 4조원 규모의 R&D 예산을 집중 지원한 정부와 연구개발에 혼신의 역량을 집중해온 산학연의 노력에 성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범용 소재부품산업의 경쟁력은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준에 이르렀으며, 국산 대체와 수출이 큰 폭으로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소재부품 1000억달러 흑자 돌파를 기뻐만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여전히 주요 소재부품의 원천·핵심기술이 선진국에 상당히 뒤처져 있다. 탄소섬유소재나 OLED 발광소재는 선진국대비 60% 수준에 머물고, 반도체나 LCD 관련 핵심소재는 대부분 일본에 의존(LCD 98% 수입)하고 있다. 소재부품의 대일무역 적자액은 163억달러(2014년)에 달하며, 세계적으로 내세울 만한 첨단 경쟁력과 글로벌 브랜드를 가진 기업도 몇밖에 없다.
우리가 목표하는 2020년 세계 4대 소재부품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선 ‘등고자비(登高自卑)’의 자세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등고자비’는 중용(中庸) 편에 나오는 고사성어로 높이 오르려면 낮은 곳에서부터 오른다는 뜻이다. 큰일을 도모할 때는 근본을 튼튼한 뒤 움직여야 한다는 의미다.
연초 열렸던 CES의 키워드는 IoT, 웨어러블, 스마트카였다. 5G, 3D프린팅, 드론, 홀로그램 등도 이슈로 떠올랐다. 차세대 신산업의 경쟁력과 부가가치 창출의 원천은 소재부품 기술에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는 명실상부한 소재부품산업의 원천·핵심기술 강국이 되는 것이다. 이제는 기존 기술의 캐치업(Catch-up)이나 패스트 팔로어가 아니라 퍼스트 무버가 돼야 한다.
영화 ‘국제시장’을 떠올리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마음먹기 나름이다.
전 세계로 확산되는 디플레이션 우려, 엔화 약세 등 대외적 여건은 녹록지 않지만, 기업들의 과감한 투자 결정이 필요한 시기다. 정부와 민간이 힘을 합쳐 퍼스트 무버가 되기 위한 투자와 노력을 배가한다면, 우리가 바라는 ‘2020년 세계 4대 소재부품강국’의 꿈은 현실로 다가올 것이라 확신한다.
김경원 전자부품연구원장 kwkvivc@ket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