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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 어른들이 모두 모인 큰 장례였다. 상복으로 갈아입은 김시원은 문상객들을 맞고 있었다. 오늘따라 김시원은 어쩐지 허술해보였다. 무겁고 침착해야 할 초혼(招魂)의 시간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가볍고 분주했다. 영광 김씨의 귀한 종손인 성준을 따로돌리며 집안 어른들과 깊숙한 대화를 가졌다.
성준은 내심 못마땅했지만 이 못마땅이 어머님의 장례식에 집중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성준에게 집중하지 못하는 미옥이를 향한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어쭙잖은 핑계를 만들어 어머님의 장례에 집중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가장 못마땅했다.
성준은 부러 아버지를 흘깃흘깃 보았다. 하지만 김시원은 좀체 아들 성준과 시선을 엉키지 않았고 혹 엉켜도 눈빛은 매웁게 비켜갔다.
어느새 미옥이 작은 아기새 마냥 조용히 와있었다. 성준의 흔한 땀손에 하얀 모시 수건을 은근히 쥐어주었다. 그 순간 김시원은 미옥의 이런 가당찮은 수작을 보았다. 김시원은 전혀 노여운 기색없이 눈짓만으로 집사인 봉덕을 불러 귓속말을 내주었다.
성준은 미옥의 손끝이라도 잡아보려고 기어이 손가락을 만지작만지작 했다. 그때 봉덕이 미옥을 거칠게 와락 끌고 가버렸다. 성준이 뭐라 말할 새도 없었다. 성준은 아버지를 보았지만 아버지는 벌써 안보였다. 소리칠 수도 없었고 따라갈 수도 없었다.
이제 초혼제(招魂祭)가 시작되고 있었다. 지붕에 올라간 어르신이 어머니의 옷가지를 흔들며 어머니를 부르고 있었다. 성준은 옷가지로 흔들리는 마지막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툭 누군가 성준의 어깨를 흔들었다. 덕길이었다.
“도련님, 미옥이 죽습니다. 그만 두십시요.”
덕길은 그렇게 가버렸다. 성준의 마음이 마지막 어머니의 옷가지처럼 흔들렸다.
“아, 어머니...”
어머니는 민제의 얼굴을 세심하게 쓰다듬었다.
“다음 해에는 꼭 건(巾)을 벗고 시제를 올려라. 먼저 혼인을 해야겠지.”
어머니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어머니, 그럼 어머니는 저의 진짜 어머니가 아니십니까? 아니 그럴 리가 없습니다. 어머니는 지금 몸이 아프신겁니다. 약쑥을 피우셨습니다. 또 배앓이가 시작되신 겁니다.”
민제는 당돌하게 변질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 싫었다. 쑥향이 진했다.
“민제야. 아버지의 사진을 보니 어떠냐?”
민제는 어머니가 건네준 사진을 제대로 보았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잘 보아라. 너와 똑같은걸? 빼다박았지. 잘생기셨지.”
사진 속의 아버지의 얼굴은 어쩌면 민제의 과거의 얼굴이기도 했고 민제의 미래의 얼굴이기도 했다.
“어머니, 빨리 말씀해 주십시오.”
어머니는 웃음을 거두고 민제를 뚫어지게 보았다.
“민제야. 이제 이 사진을 네가 가져라. 그리고 이 보자기엔 아버지의 유품이 들어있다. 아버지의 모든 것이다.”
민제가 어머니의 손을 덥석 잡았다. 다급했다.
“어머니. 어디로 떠나십니까? 왜 이러십니까?”
“난 평생 감옥에 갇혀 살았다.”
“감옥이요?”
“그래. 너의 아버지가 나에게는 감옥이었다.”
민제는 갑자기 뒤틀리는 자신의 피의 정체성이 두려웠다.
“어머니. 어머니는 평생 살아계시지도 않은 아버지를 살아계시는 것처럼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머니의 얼굴은 그저 온화했다.
“그러니까 이제 벗어나려 한다. 아버지는 한 번도 내게 눈길을 주신 적이 없으셨다. 아마 내 얼굴도 모르실걸? 오로지 너의 어머니만 마음에 두셨지.”
민제의 입술이 바짝 타들어갔다. 자꾸 입술에 침을 발랐다.
“첫날 밤, 나를 버리고 가셨지. 그리고 돌아가시고 난 후, 아들이 하나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리고 나는 너를 애써 찾았다.”
민제는 눈이 퀭 했다.
“이제 아버지를 너의 어머니에게 온전히 돌려드려야겠다.”
“모야. 모야.”
윷판을 벌인 남정네들의 흥에 왁자지껄했다.
“얼마만인지. 이런 흥을 보다니. 해방이 이리 좋은거구나,”
어머니는 민제에게 잡힌 손을 빼어 민제의 손을 더욱 강하게 잡았다.
“민제야. 나도 해방되고 싶구나,”
민제 옆에서 허둥대던 아기새가 날아가고 없었다.
“도련님.”
봉덕이 성준을 불렀다. 봉덕은 나이가 환갑을 훌쩍 넘었지만 집안 누구든 그를 그저 ‘봉덕아’라고 불렀다.
“무슨 일이야?”
“아버님이 전하시랍니다.”
성준은 벌써부터 가슴이 쿵쿵 뛰었다.
“어머님의 상을 마치면 서울로 곧바로 가시랍니다. 학교로 돌아가시랍니다.”
“49제는?”
“따로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성준은 줄곧 허약했던 자신의 날개가 드디어 꺾이는 느낌을 받았다. 한 번도 제대로 날개짓을 펼치지 못했던 아직 아기새의 날개였다.
“이건 감옥이다. 감옥.”
성준은 안절부절이었다. 봉덕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 큰 눈알을 굴리며 지나치게 조심스러워했다.
“그 계집 얘기는 알려하지 마십시오. 불쌍한 년입니다.”
봉덕은 목에 가시 걸린듯 킁킁거렸다. 목이 메이는 것이었다.
“도련님, 미옥이는 팔려갑니다.”
성준은 깜짝 놀랐다. 심장이 터질 듯 했다.
“무슨 말이냐?”
그때였다. 요란하고 낯선 불한당 같은 소리가 난데없었다.
주재소에서 들이닥친 일본 순사들은 감히 장례의 내용과 장례의 형식을 헝클고있었다.
“이집에 독립군을 돕는 놈들이 있다고 들었다.”
“이노옴. 이런 때려죽일 놈.”
김시원의 추상같은 음성은 난데없는 불한당 같은 소리를 가르며 가파르게 날을 세웠다.
일본 순사들은 그들의 번잡한 역사만큼이나 징그럽게 뻔뻔했다.
“이 집의 모든 목숨붙어 있는 것들을 잡아다 조사해야겠소. 영감.”
김시원은 버선발로 마당에 급하게 내려섰다. 하지만 종가의 어른들이 막아섰다.
“참아야 하네.”
일본 순사들은 여인을 겁탈하듯 닥치는대로 방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방문은사정없이 떨어져나갔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성준이 소리쳤다. 그러나 일본 순사들은 순식간에 이 집의 역사를 장악했고 미옥이 어디선가 끌려나왔다. 성준은 숨이 막혔다.
“미옥아.”
주재소장은 미옥의 머리채를 잡아 얼굴을 모로 틀었다.
“반반한 노비 계집이네. 네가 독립군과 내통했느냐?”
미옥이는 입술을 야무지게 깨물었다. 주재소장은 미옥의 얼굴을 주먹으로 갈겼다. 미옥의 얼굴이 완전히 돌아가며 입술이 찢어졌다. 그 순간 어디선가 작은 도끼가 날아와 주재소장의 뒷 머리통에 박혔다. 작은 도끼의 벼린 날이 그토록 힘차게 푸르렀다.
소설가 하지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