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하여>
덕길은 패물 둘을 골랐다. 두툼한 덩이의 금비녀와 큼지막한 알의 비취였다. 비취는 얼마나 탐스러운지 당장이라도 미옥의 손에 쥐어주고 싶을 정도였다.덕길은 그 이상의 패물에 눈길도 주지않았다. 젊은 청년들은 덕길의 뜻에 딴 말이 없었다. 덕길은 생각 이상으로 믿음직했다. 성준이 오히려 위축감이 들 정도였다. 어쩐지 덕길이 그의 장차 주인일 듯 싶기도 했다.
덕길은 곧 떠날 차비를 하였다. 미옥이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하지만 곧 자지러지고 말았다. 미옥의 한 쪽 발목이 부어지며 꺾여있었다.
“어떻게 참고 있었어?”
덕길은 불같이 화를 냈다. 미옥은 방정떨지 않았다.
“저분들은 나를 위해 목숨을 걸었는데 내가 어떻게 이까짓 다쳤다고 엄살을 필 수가 있어? 난 괜찮아.”
하지만 성준의 눈에도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발목이 꺾이며 획 돌아가있었다. 의원이 필요했다. 성준은 괜히 덕길의 눈치를 보았다.
“미옥이는 걷지 못할 것 같은데...”
덕길은 들은 척 만 척 했다.
“내가 업고 가면 되오. 내 힘이 장사요.”
그러자 미옥이 나섰다.
“너와 저분들은 일본 헌병대가 쫒고 있어. 나를 업고 가면 필시 잡히고 말거야. 난 안되겠어. 덕길아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자.”
덕길은 얼굴을 돌려버렸다. 부아가 치밀었다. 젊은 청년들은 눈알만 데굴 굴렸다. 그 중 흥칠이가 슬쩍 까불었다.
“우리의 신념은 미옥이를 구출하는 것이었는데, 지금와서 미옥이를 내버리고 간다는 것은 아니라고 보오,”
그 중 형식이가 행세를 했다.
“그렇지만 미옥이를 데리고 간다면 우리의 도주는 늦어질 것이 뻔하오. 우리는 잡히고 말거요, 잡혀서 그저 곧바로 죽임을 당하는 것이 두렵지 않소. 일본 놈들은 산채로 대갈통 가죽을 벗긴다 들었소. 난 그건 싫소.”
성준은 이제 눈치없이 단호했다.
“미옥이를 내버리고 간다고 생각지 마시오. 내가 보살필테니.”
덕길은 꼬인 심성으로 성준의 멱살을 잽싸게 잡았다.
“도련님은 미옥이를 구하러 오지 않았소. 지금 와서 생색내는 것이오?”
성준은 덕길의 손아귀를 벗어나려 애쓰지 않았다.
“네 마음 다 안다. 난 그럴 마음 추호도 없다. 하지만 미옥이도 살고 너도 살고 저분들도 살아야 하지 않겠냐? 한 발 후퇴다. 모두를 죽일 셈이냐?”
덕길은 눈알에서 핏빛이 치솟았다. 성준은 되도록 침착했다.
“도피가 길어질 수도 있으니 이걸 모두 가져가라. 미옥이와 다시 만나려면 반드시 필요할거다. 우리 모두 다시 만나야 한다. 덕길아.”
덕길은 그제서야 성준의 멱살을 툭 풀어주었다. 그리고 건네주는 패물을 덥석 받았다.
“움직이자.”
덕길의 말에는 뼈대가 있었다. 젊은 청년들은 각자의 무기를 부지런히 챙겼다.
“뒷산으로 올라가라. 절대 능선은 타지말고.“
젊은 청년들은 갑자기 소란스러웠다.
“뒷산은 위험하오. 딴 길 없소?”
흥칠이는 흥분했다.
“덕길이와 내가 어린 시절부터 놀던 길이오. 비밀스런 길이 있소. 덕길이가 잘 알 것이오. 우리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니던 곳이오.”
성준은 덕길이게 동의를 구했다.
“영감 마님의 눈을 피해 도련님과 철없이 놀던 길이 결국 우리의 도피로가 되는 것이오?”
덕길이도 참으로 헛헛했다. 세월이 참 이상했다. 덕길이는 미옥의 손을 불끈 잡았다.
“참고 있어라. 내가 데리러 온다.”
덕길은 그 말 뿐이었다. 미옥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덕길의 눈만 빤히 보았다. 서로를 향한 본래의 믿음이 교차했다.
“자.”
덕길이 먼저 앞장 섰다. 그러자 젊은 청년들이 뒤따랐다. 순식간에 빠저나갔다. 걱정도 슬픔도 없이 가버렸다.
성준과 미옥만이 남았다. 성준이 긴장감으로 머뭇거렸다. 미옥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저...안아주셔요.”
성준은 와락 미옥을 껴안았다. 미옥의 눈에서 눈물을 흘렀고 성준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도련님...”
“미옥아...”
“얼례 방에서 기거해라.”
미옥이 기겁을 했다.
“얼례까지 죽일 생각이세요? 그건 안됩니다.”
성준은 미옥의 얼굴은 두 볼을 만졌다.
“그럼 네가 비밀스럽게 거처할 곳은 없다.”
“이 동굴에 있겠습니다.”
미옥의 옹골찬 대답에 성준은 꽤 놀랐다.
“이곳은 사람이 기거할 곳이 못된다. 어둡고 습하다. 오히려 병이 위독해진다.”
미옥이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아닙니다. 저들이 저를 살리려고 했기 때문에 저는 살고자합니다. 저들의 희생을 버릴 수 없습니다. 이곳에 기거하면서 삶을 도모하겠습니다.”
성준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래. 내가 널 보살피마. 일단 짚단부터 챙겨올게. 물과 먹을 것도. 배도 고플 것이고, 어서 나아야지.”
성준은 급하게 일어섰다.
“조심하십시오. 헌병대가 이 집도 들이닥칠겁니다. 아버님이 걱정입니다. 저와 덕길이 때문에 이 집안이 망가지는 것은 저도 싫습니다.”
성준이 다시 미옥이를 안았다.
“너는 네 걱정만 해라. 내 아버지시다. 내가 아버지를 지킬 수 있다. 방법이 있다.”
미옥이는 어쩐지 불안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마을의 주재소가 불타버리고 마을의 야산이 불타버리고, 마을의 인심은 그야말로 겁나게 뒤숭숭했다. 성준은 별일 없는 듯 노비들을 능숙하게 다루었고 그래서 집안은 아직까지는 고요했다. 성준의 아버지, 김시원은 성준의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모습이 이상했지만 딱히 꼬집어서 탓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 일본 헌병대가 집을 돌며 쥐잡듯이 뒤지고 있었다. 성준은 미옥이 기거하는 광을 벌써 폐쇄했었다. 밖에서 보면 그저 집의 뒷산의 허름한 일부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날, 작년 가을에 도망쳤던 노비 광수가 돌아왔다. 비렁뱅이 모습으로 돌아온 광수는 김시원 앞에 엎드려 꺼억꺼억 서럽게 울었다. 그는 광수를 벌하지 않았다.
“일손이 부족하다.”
그게 다였다. 성준은 광수를 보며 무언가 불길했다.
“도련님, 놈들이 뒷마당으로 몰려갔습니다.”
얼례가 호들갑이었다. 성준은 벌떡 일어났다.
소설가 하지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