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업구조가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영원한 버팀목으로 기대되던 주력 산업 입지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주력 산업은 국내 경제에서 역할을 다하고 세계 시장에서 입지를 지키기 위해 버거운 상대와 혈투를 벌였다. 정부도 산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우리 주력 산업이 자국 경제규모를 바탕으로 한 중국의 물량 공세를 계속 이겨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정부와 기업은 이러한 변화를 일찍 감지하고 새로운 먹거리 산업을 발굴·육성하기 위해 힘썼다. 차세대 성장동력산업, 미래창조산업 등 다양한 정부 사업이 추진됐다. 대기업도 신수종산업을 발굴하기 위해 역량을 총동원했다.
중소기업 혹은 창업기업의 창의적 역량을 활용하려는 노력도 전개됐다. 2000년대 초반 벤처 지원정책과 이에 따른 벤처 붐이 대표적이다.
이 같은 정부·기업의 노력에도 기존 주력 산업을 대체하거나, 적어도 보완 역할을 담당할 만큼 눈에 띄게 성장한 산업이나 기업을 찾아보기 힘들다. 왜 그럴까. 박근혜정부 들어서 강조하기 시작한 창조경제 실현에 필요한 창의력이나 상상력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드라마, 영화, K팝, 게임, 애니메이션 등으로 대표되는 한류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것을 보면 창의력이 모자란다고 할 수는 없다. 정보기술(IT) 기업의 발전 속도는 괄목할 만하고, IT를 응용한 새 비즈니스가 속속 등장하는 것을 보면 역동성만큼은 실리콘밸리 못지않다.
그럼 왜 이 분야는 과거 주력 산업처럼 세계적인 비즈니스로 커가지 못할까. 더 명확히 질문한다면 MS·구글·아마존·애플·페이스북 등으로 대변되는 미국 기업처럼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으로 발돋움하지 못할까.
그 답으로 우리 기업이 협업에 인색하다는 점을 들고 싶다. 기존 대기업은 선진국 기업을 벤치마킹해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품질도 더 좋고 값도 싼 제품을 만들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이들 기업은 우수한 인재를 선발해 뛰어난 경영인·기술자·시장개척자 등을 길러냈다. 이른바 ‘비즈니스 테크노크라트’를 양성해 세계 어느 경쟁자도 이길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최근에는 국내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필요한 인재를 충원한다.
이렇게 뛰어난 창의성을 발휘하는 새로운 비즈니스 그룹과 세계 선두 수준의 비즈니스 테크노크라트가 힘을 합쳐 신산업을 만들 가능성은 없을까.
살펴보면 세계를 선도하는 실리콘밸리 기업군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장착한 기업과 협력하거나 인수합병(M&A)해서 자신의 팀으로 합류시키는 작업을 끊임없이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가진 역량을 더 넓히고 새롭게 하는 과정을 지속하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이들 거대기업이 협업 대상이 되는 창업기업이나 중소기업의 가치를 인정하고, 협업 파트너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협업 과정에서 시너지 효과가 일어날 뿐 파열음은 크게 들리지 않는다. 국내 대중소기업 관계에서 ‘갑을’ ‘기술탈취’ 등 부정적인 소리가 자주 들리는 것과 대조적이다.
실리콘밸리 방식의 협업을 이루기 위한 선결조건은 서로 가치를 인정하고 상대를 진정한 협업 파트너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기존 대기업은 바깥 인재를 무조건 ‘인하우스(in-house)’ 인재로 만들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자신보다 작은 상대이고 행동 방식도 다르지만 상대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존중하고 비즈니스 방식의 특수성도 인정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파트너가 가슴을 열 것이다.
반대로 창의력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비즈니스 진영도 기존 대기업의 기술력·효율성·경험 등을 존중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가질 때 대기업의 아낌없는 협력을 얻어낼 것이다.
두 그룹의 힘이 합쳐질 때 세계를 선도할 새로운 산업, 즉 창조산업이 우리나라에서 쑥쑥 자라날 수 있다. 물론 정부도 이러한 협업을 진작시키기 위해 제도적 지원 장치 마련에 힘써야 할 것이다.
김도훈 산업연구원장 dhkim@kiet.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