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사정(司正)과 사정(事情)

[데스크라인]사정(司正)과 사정(事情)

“1300 대 1이랍니다.”

며칠 전 대기업 계열사 경영진이 식사 자리에서 한참 머뭇거려 꺼낸 올해 신입사원 경쟁률이다. 수십 대 1, 수백 대 1 경쟁률로 회사 자랑했던 지난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 그런 흥은 사라진 지 오래다.

대학 졸업생에게 꽤나 인기 있는 직장인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 높을지 몰랐다. 이쯤이면 원래 뽑지 않는 건데, 뽑으라니 시늉하는 기업의 고민이 훤히 보일 정도다. 그 경영자는 “계열사별로 있는 사람도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처지에 새 사람 뽑을 여유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숫자를 배분해) 폭탄을 돌릴 수밖에요”라고 했다.

요즘 이렇다.

제품이나 서비스를 내놔도 사는 사람이 없으니 생산·관리·영업 인력이 임금만큼 돈을 못 벌어들인다. 새로운 사업 돌파구가 꽉 막히니 기획·경영·아이디어를 충전할 새로운 인력이 필요 없다. 취업 희망자가 차고 넘치니 ‘스펙’은 인플레이션돼 외국대학 석·박사까지 줄을 선다.

국내외 투자는 어떤가.

기업은 금리가 사상 최저 수준인데도 돈 쓰기가 겁난다. 채용·설비 및 R&D 투자 부문 정부 요구는 계속 이어질 텐데, 먼저 ‘자진납세’할 이유를 못 느낀다. 매만 안 맞을 정도로 정부 눈치만 살피고 선뜻 나서진 않는다. 미국은 경기가 되살아나고 있는 건 확실한데 언제 거꾸러질지 모른다. 중국은 한동안 성장을 계속할 것이란 예상은 갖지만, 시장은 여전히 믿고 투입할 정도로 투명한 상황이 아니다.

이런 기업 사정(事情)을 정부는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 대통령이 부정부패 일소를 명하자 국무총리가 ‘전쟁’을 선포하며 일대 소탕작전에 나섰다.

포스코건설이나 방산비리 관련 대기업 몇몇 곳은 이미 압수수색까지 당했다. 검찰은 기업-정치권 연결고리 안까지 파고들 기세다. 일부 기업에서 야기된 일이지만, 다른 기업도 더 바짝 낮출 수밖에 없다. 뛰어도 모자랄 판국에 기면서 여론까지 살펴야 할 비루한 신세다.

부정부패는 척결돼야 하고, 어떤 경제적 장난도 법 앞에 용납돼선 안 된다.

경제 살리기에 집권 3년차 대통령이 기업부터 다잡겠고 나선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공무원의 전횡을 막겠다고 ‘관피아’ 척결을 외쳤던 집권 초반 아이러니가 자꾸만 오버랩된다.

대통령은 오히려 기업계 사정(事情)을 살피고, 민심을 다독이면서 이 국가적 위기를 타개할 에너지를 끄집어내야 한다.

사정(司正)은 검·경과 행정부 라인에 맡기고, 이들의 역할이 전체 경제 살리기 방향에서 틀어진다면 그것조차 바로잡고 새 방향을 잡아줘야 할 위치에 있다.

마침 30대 그룹이 올해 136조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최근 정부 강경 기류와 연관성이 전혀 없어보이진 않는다.

그래도 불황 속 힘겨운 국민이 기업을 ‘나쁜 존재’로만 인식하도록 내버려둬선 안 된다.

이진호기자 jho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