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경제를 걱정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한강의 기적을 주도했던 주력 산업군의 글로벌 경쟁력에 적신호가 켜지고 있고, 전 세계적 저성장 기조, 심화되는 저출산·고령화 등으로 나라살림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 안정적 세수확충과 효율적 예산활용은 정치·경제·사회 전 분야를 막론하고 우리 시대 주요한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정부 R&D 예산은 2012년 16조원에서 2015년 18조8000억원으로 증가하고 있고, 정부 총예산에서 R&D 예산이 차지하는 비중도 높아지고 있다. R&D 투자 강화로 신사업·신시장 창출에 필요한 지속 가능한 국가 성장기반을 마련하고자 하는 정부와 국민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이제 과학기술계는 R&D 예산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명확한 성과를 내야 하는 보다 엄중한 과제와 책무를 안게 됐다.
첨단 R&D, 특히 선도형·프런티어형 연구는 본질적으로 첨단·대형 연구장비에 기반을 두고 있다. 노벨 물리학상 약 20%가 대표적 대형 연구시설·장비인 가속기 기반 연구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과거에는 연구시설·장비가 과학기술 진보의 수단이었다면, 오늘날은 첨단화된 대형 연구시설·장비가 새로운 과학기술을 견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국가적 대형 연구시설·장비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이러한 중요 연구시설·장비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를 넘어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할 것인지 국가 차원의 고민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시점이다.
선진국의 사례를 살펴보자. 다수의 노벨 화학상을 배출한 미국 아르곤 연구소의 방사광가속기, 몇 해 전 힉스 입자 발견으로 노벨 물리학상 수상 기반이 됐던 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CERN) 거대강입자가속기는 국가와 대륙을 넘어 전 세계 과학자에게 개방돼 있다.
그리고 선진국 대형 국책연구기관은 고가의 대형 연구시설·장비를 설치·관리하고 개방형으로 운영하는 것을 중요한 임무로 설정하고 있다. 이처럼 선진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는 국가R&D 인프라를 소유와 독점에서 공유와 개방으로 전환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미래부 등 관련 정부부처는 이러한 전 국내외적 추세를 반영해 연구시설·장비 공유 및 개방에 정책적 역량을 모으고 있다. 하지만 최근 조사 결과에 따르면, 외부 연구자가 활용 가능한 국가R&D 연구시설·장비의 비율이 60%대에 머물고 있다. 나머지 연구시설·장비는 소유기관 울타리 안에서만 활용이 가능한 상황이다.
아직도 수많은 중소·중견기업은 고가의 연구시설·장비를 구입·운용하기 어려운 실정임을 감안할 때, 보다 적극적인 연구시설·장비의 개방 및 공동활용 정책 추진은 시급한 실정이다.
첨단 연구시설·장비 개방과 공동활용은 R&D 예산활용 효율화만의 문제는 아니다. 최근 과학기술이 대형화, 융·복합화되면서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가 우수한 연구자들이 관련 시설·장비를 중심으로 모여 새로운 시너지를 창출하는 것이다.
대형 연구시설·장비의 개방과 공동활용 활성화는 융합연구를 더욱 활성화하고, 융합연구의 토대가 되는 인력교류와 협력을 활성화에 기여할 것이다.
또 중소·중견기업 지원과 기술창업 활성화에도 연구시설·장비의 공동활용은 중요한 이슈다. 언급했듯이 중소·중견기업이 고가의 연구시설·장비를 보유·활용하는 데 한계가 있고, 이것이 이들 기업이 생산형에서 혁신형으로 진화하는 데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출연(연), 대학 등 대다수 국가 R&D 인프라를 운용하는 연구주체가 이들 중소·중견기업에 단순히 연구시설과 장비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이들이 이러한 연구시설·장비에 기초해 지속적인 혁신역량을 기를 수 있도록 최고 숙련도를 보유한 인력과 역량 지원이 수반돼야 한다. 이를 통해 진정한 산학연 협력의 시너지가 구현될 수 있다.
국가와 산업분야를 막론하고 전 세계는 공유경제가 가져오는 파급효과와 생활의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과학기술 인프라 공유 또한 더 이상 효율적 예산활용 이슈에 국한되지 않는다. 스마트하게 설계·활용되는 연구 인프라는 우수한 인력을 모아 세계적 연구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혁신적인 우수·강소 기업을 배출하는 창조경제 실현, R&D 혁신의 든든한 기반이 될 것이다.
이병권 한국과학기술연구원장 bglee@kist.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