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단상]미디어벤처, IT벤처와 방송 플랫폼의 만남

박성철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 미디어산업진흥부장
박성철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 미디어산업진흥부장

방송업계에서는 ‘벤처’란 말을 쓰지 않는다. 실제로 벤처가 없기 때문이다. 벤처가 생겨날 수도 생존할 수도 없다. 큰 방송사일수록 벤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방송사 내부 기술개발 조직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긴다. 무엇보다 기존 방송 수익구조를 위협하는 새로운 기술이나 서비스가 등장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미디어 시장에 도전했던 몇몇 벤처는 높은 장벽만 확인하고 물러서야만 했다.

그런데 지난 1일부터 3일간, 방송 플랫폼사와 IT벤처사가 한자리에 모이는 보기 드문 행사가 있었다. 지상파, 케이블, IPTV를 망라한 21개 플랫폼사와 117개 IT벤처 및 중소개발사가 참가했다. ‘스마트미디어X 캠프’로 이름 붙여진 이 행사는 미래부가 추진하는 스마트미디어 활성화 사업 일환으로 마련됐다. 새로운 스마트미디어 서비스 개발을 지원해 줄 대상자를 선정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

그러나 별도 심사위원이 없다. 두툼한 사업계획서나 서류더미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프레젠테이션을 위한 무대와 스크린, 넓은 객석이 마련됐다. 벤처사는 무대에 올라 새로운 스마트미디어 서비스 아이디어를 발표한다. TED 연사처럼 능숙한 발표자가 있는가 하면, 많은 청중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은 처음인 초보 창업자도 있다. 제한시간을 넘겨 준비한 내용을 미처 다 발표하지 못하기도 하고, 발표내용을 잊어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기도 한다. 스티브 잡스처럼 능숙한 발표는 아니지만 제안하는 서비스에 자신감과 열정은 넘쳐난다.

객석의 방송 플랫폼사 직원은 발표를 들으며 열심히 메모를 한다. 발표가 끝난 벤처사 대표를 따라 나가 궁금한 점을 묻고 명함을 교환하느라 바쁘다. 발표를 들은 방송 플랫폼사는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아이디어에 대해 협의를 제안한다. 잠깐 둘러보러 왔다던 방송 플랫폼사 실무자가 발표내용이 흥미롭다며 사흘 내내 자리를 지키는 모습도 보인다. 벤처사와 방송 플랫폼사는 팀을 이뤄 사업계획서를 작성하고, 정부는 이를 평가해 개발비 일부를 지원한다. K팝 스타 공개오디션 시스템을 스마트미디어 아이디어 선발에 도입한 셈이다.

이 행사는 IT벤처사와 방송 플랫폼사의 공식적인 만남의 자리를 만들었다는 데 가장 큰 의의가 있다. 방송 플랫폼사 폐쇄적 분위기는 IT벤처사에는 큰 장벽이었다. 어렵게 담당부서를 찾아도 담당자가 만나주지 않아 애를 태우곤 한다. 여러 플랫폼사를 한자리에 모아놓고 아이디어와 기술력을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IT벤처사로서는 쉽게 오지 않는 기회인 셈이다.

둘째, 공개와 참여 원칙으로 진행돼 사업자 간 경쟁 심리를 자극할 수 있었다. IT벤처사 프레젠테이션은 행사에 참가한 모든 이들에게 공개됐다. 벤처사는 벤처사대로, 방송 플랫폼사는 플랫폼사대로 자신들의 것과 유사하거나 한발 앞선 경쟁사의 아이디어와 개발 일정에 긴장해야 했다.

셋째, 초보 벤처사들에 시장진출에 필요한 요소들의 유익한 경험을 제공했다. 의외로 자신의 기술력만 믿고 있는 벤처사나 1인 창업자가 많다. 플랫폼사와 투자자, 이용자를 설득하는 일은 소홀히 하는 때가 많다. 10분간의 프레젠테이션을 마치고, 발표 자료와 발표기술의 중요성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참가 의의는 크다.

방송, 통신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기존 대형 사업자만으로는 스마트미디어 시장 활성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수많은 IT벤처와 개발사가 방송 플랫폼과 어울린 새로운 생태계가 조성돼야 한다. 이번 스마트미디어X캠프는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 생태계가 만들어지고 살아나는 데 방해가 되는 걸림돌을 하나씩 치워주는 것이 정부 몫이다. ‘미디어벤처’라는 말이 익숙해지도록 말이다.

박성철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 미디어산업진흥부장 scp0314@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