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통신 분야 전문가인 영국인과 점심을 같이 했다. 근황을 들어 보니 우리나라 스타트업에 자문해 주면서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우리나라에는 왜 유망한 스타트업이 없는가’ ‘왜 우리나라 스타트업이 글로벌로 크지 못하는가’라는 주제로 열띤 토론을 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성공하는 스타트업이 많은 반면에 독일과 일본에서는 눈에 띄는 새로운 스타트업이 나오지 않는 이유를 따져 물었다. 그의 대답에 내가 오랫동안 의문을 품었던 문제가 확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미국과 영국은 기본적으로 불문법 체계라 새로운 기술에 따로 법을 만들 필요가 없지만, 대륙법을 주축으로 하는 독일·일본은 새로운 것을 하려면 항상 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보기술 발전이 워낙 빨라 위원회를 만들고 공청회를 하고 관계 공무원, 국회의원에게 설명하고 법을 통과시켜서 뭔가 해보려고 하면 이미 시장에서는 게임이 끝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렵게 여기저기 찾아다니면서 법을 만들어도 항상 여론에 쫓겨 급하게 만들기 때문에 법이 엉성해서 빈틈도 많고 뒷말도 많다. 청부 입법이란 말도, 입법 로비라는 말도 있다. 거기다가 우리나라의 그 유명한 ‘떼법’도 있다. 단식투쟁하고 집요하게 데모하면 그들만을 위한 법을 만들어 주지 않았던가. 이런 법은 항상 이해관계자를 위한 법이었지 국가의 미래나, 국민 전체를 위한 법이 아니었다.
지금 각종 전시회나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신기술이라고 하는 것을 살펴보자. 핀테크, 빅데이터, 드론, 무인자동차, IoT 등이다. 얼마 전 신기술 세미나에서 어떤 물류업체 CIO가 미국에서 드론을 사와서 테스트하려고 했더니 서울 강북에서는 각종 비행 허가 문제로 승인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에는 지방으로 옮겨서, 그것도 사내 옥상에서 주차장까지만 날려 봤다고 했다. 드론을 상업적으로 쓰고자 테스트하는 문제에 명확하게 총대를 메는 부서가 없다고 한다. 공무원도 일을 안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드론과 관련된 부처만 10여개 된다고 한다. 10여 부처가 서로 모여서 제대로 된 드론 육성법을 제때 만들 수 있을까. 이런 상황이 어찌 드론뿐이겠는가. 무인자동차, 핀테크, 빅데이터, 클라우드 펀딩 법은 어떤가. 이런 상황에서 핀테크, 빅데이터, 드론, 무인자동차, IoT가 창조경제 첨병으로서 젊은이 취업율을 올리고, 경기를 활성화하고, 나아가 해외에서 시장을 개척할 수 있다고 보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관련 법을 만들기 어려우면 일단 실행하고 문제가 있을 때 사후에 천천히 법을 만들 수는 없을까.
이 모든 일이 우리가 뭔가를 하려면 관련 법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근거 법률이 있어야 나중에 감사를 받아도 무사할 수 있다. 조직을 만들고, 예산을 쓸 수 있고, 각종 인허가도 할 수 있고, 위원회나 협회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이제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모든 방면에서 법을 만들어 사후에 사회통제를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법을 이용해 선진화된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국민의, 사회의 요구가 빠르게 변해 가는데 반해 법을 만드는 프로세스가 너무 복잡하고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법을 집행하는 사람도 정보기술 관련 사건을 맡으면 전문 분야를 공부하느라 애먹을 것이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법을 해석해서 판결하면 사회정서에 반한다고 난리다. 법을 만들기도, 취지에 맞게 집행하기도 힘든 상황이 됐다. 더군다나 그런 법체계에 기대 새로운 정보기술 분야를 육성하고 신사업을 일으키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무리가 있어 보인다.
많은 분야에서 법이 없어서 지원이 안 되고, 산업이 육성되지 못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특정 산업이 법이 없어서 발전되지 않고 있는 것일까. 예전 산업화 때는 투자가 대규모로 필요하기 때문에 정부 정책과 예산으로, 또는 은행 지원으로 재원을 확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상상력과 창의가 필요한 시대다. 지금 해외에서 성공한 스타트업은 아이디어 하나로 엔젤투자자로부터 수백억원, 수천억원을 끌어 모았고 그 자금에 바탕을 두고 성공했다. 정부나 은행이 지원해서 성공했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사회·경제적 환경이 변했고 고객이 변했고 시장이 변했는데 아직도 예전 산업화 과정 산업육성 정책에 매달리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법조계에 있는 이들이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할 것이다. 나도 쉽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연일 언론에 ‘여전한 규제’ ‘잠자고 있는 법안’ ‘협상 결렬’과 같은 기사가 오르내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 국가의 장래와 우리 사회 미래를 위해 뭔가 근본적인 법 체계 전환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생각해봤다.
CIO포럼 명예회장(명지대 교수) ktlee77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