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이 지하 광산에 설치한 핵폭탄이 폭발한다. 지프차를 타고 도망가던 악당은 시동을 끄고 기다리지만 핵폭탄을 찾으러 온 특수부대 헬기는 날벼락을 맞는다. 강력한 전자기파가 헬기 전자장비를 태우자 헬기는 불꽃을 튀기다 추락한다. 1996년 개봉한 존 트라볼타 주연 ‘브로큰 애로우’ 한 장면이다.
헬기가 추락한 것은 핵폭발 때 발생한 고출력 전자기파(EMP)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발생한 고출력 에너지가 헬기 전자 장비를 불태워 운행불가 상태로 만들었다. 전자기파를 이용한 공격은 브로튼 애로우 외에 여러 영화에서 등장한다.
‘매트릭스2’에서는 함선에서 발사한 EMP로 수십여 센티넬을 한 번에 무력화시킨다.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는 배트맨이 ‘EMP 블라스터’라는 신종 무기로 주변 전자기기를 불능으로 만든다. ‘트랜스포머2’에서는 스타스크림이 EMP로 군인의 교신을 차단한다. 지난해 방영된 국내 드라마 ‘쓰리데이즈’에도 EMP 폭탄이 등장한다.
EMP 폭탄은 일정 반경 내 모든 전자제품과 통신, 전기를 마비시킨다. 사람에게는 무해하기 때문에 ‘인도적 살상무기’로도 불린다. EMP 전용 폭탄도 문제지만 핵폭탄은 터지는 고도에 따라서 수백㎞ 내 전자기기 회로에 과부하를 흘려 장비를 파괴한다. 통신망이 마비되면 세상은 원시시대로 돌아간다. 군뿐만 아니라 민간시설에도 큰 타격을 입힌다.
EMP는 영화 속에서만 등장하는 기술이 아니다. 이미 현실에서 군사 무기로 개발됐고 점차 발전하고 있다. 걸프전에서 미군이 이라크 방공망을 무력화하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알러졌다. 이후 나라별로 EMP 폭탄 연구와 방호시설 개발이 한창이다.
EMP 폭탄은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상대 중추 통신망을 무력화시킨다. 반면에 대응에는 큰 비용이 든다. 이에 따라 미국, 중국, 러시아 등에서 EMP 폭탄 개발에 힘을 쏟고 있다. 북한이 러시아 출신 전문가 지원을 받아 EMP 폭탄을 개발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렸다. 우리 정부도 EMP 폭탄 심각성을 깨닫고 관련 기술을 개발 중이다.
EMP 폭탄에 대응할 수 있는 방호시설 구축도 한창이다. EMP 방호시설은 금속으로 시설 전체를 감싸고 입구는 이중으로 만들어 동시에 열리지 않게 한다. 내부에는 항온·항습기를 비롯한 공조설비와 비상용 발전기 등을 갖췄다.
합참 지휘부 등 일부 국방 시설에는 이미 EMP 방호시설이 구축됐다. 중요 시설로 지정된 수백여 시설에도 순차적으로 구축이 추진된다. 하지만 공공시설 외 통신사 등 민간 분야에서는 아직 EMP 대응에 나서는 곳이 없는 실정이다.
업계 전문가는 “EMP는 더 이상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현실화된 이야기로 주요 기관과 민간 시설이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 있다”며 “공공뿐만 아니라 민간 분야에서도 세부적인 대응 방안을 마련해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호천기자 hca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