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장비업계가 발주량 급감과 갑의 횡포에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다. 기대했던 국가재난안전통신망(재난망) 사업도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개점휴업’ 기업이 늘어난다.
화웨이로 대변되는 중국 기업 저가공세까지 겹쳐 사면초가 형국이다. 네트워크 뿌리산업이 고사위기에 처하면서 투자유인, 해외 진출 등 다양한 지원책 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대한민국 통신산업 기반이 와해되고 있다.
28일 중계기, 기지국 부품, 데이터 장비, 전송장비를 비롯한 주요 유무선 통신장비 업체에 따르면 지난 1분기 전체 발주 물량이 지난해 동기 대비 20~30% 감소했다. 2011년 LTE 상용화 이후 3년간 꾸준히 통신사 신규 투자가 이어졌지만 지난해부터 발주 물량이 눈에 띄게 줄었기 때문이다.
중견 전송장비 업체 한 임원은 “전송 분야는 올해 1분기 장비 수요가 지난해 동기와 비교해 반토막으로 줄었다”며 “기가인터넷 등에서 일부 투자가 있지만 대부분 업계가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2분기 이후에도 마땅한 신규 투자 기약이 없는 게 더 심각한 문제라고 털어놨다.
건실했던 한 기지국 관련 업체는 결국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지난해부터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올 초 연구 인력을 먼저 감원했고 연말까지 전체 인력 20%를 줄일 계획이다. 수익성이 악화되면서 다른 회사로 옮기는 인력도 생겨났다.
올해 통신사 설비투자 규모는 6조4000억원으로 지난해(6조8710억원)보다 7%가량 감소할 전망이다. 1분기는 KT 부정당 제재 기간이 겹치면서 발주량 감소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예년보다 사업 물량이 크게 줄었다.
기대를 걸었던 재난망 사업도 예산 재검토로 지연되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5월 중순까지 검토를 마칠 계획이다. 하지만 예산 외에도 정보전략계획(ISP) 자체에 문제가 많다는 잡음이 일고 있어 사업 착수 시점은 미지수다.
원가 수준으로 가격을 후려치는 ‘갑의 횡포’도 업계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민간 통신시장 대안인 공공분야는 수년에 한 번씩 발주할 때마다 입찰 가격을 15% 정도 낮춘다. 회선 속도와 장비 가격은 높아지는데 가격만 내려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다. 사업을 수주해도 이익이 안 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통신사도 자체 망 구축 사업을 시장 가격보다 낮춰 발주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최근 한 통신사가 장비 가격을 정상가 30%까지 낮춰서 입찰하라는 요구를 해 업계 반발이 일기도 했다.
업계 관계자는 “일정 금액 이하로 입찰하면 감점을 주는 소프트웨어와 달리 회선을 포함한 통신장비 분야에는 그런 규정조차 없다”며 “채산성이 안 좋으니 신규 개발은 생각도 하기 어려워 국산 장비 경쟁력이 떨어지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업계는 일러야 2019년 새로운 통신 투자가 발생할 것으로 전망했다. 2018년 동계올림픽에서 5세대(5G) 이동통신 시연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후 한동안 줄었던 신규 투자가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그때까지 3~4년간 시장은 냉각기를 보낼 수밖에 없다.
해외 수출이 대안으로 거론된다. 하지만 단품 장비로는 규모의 경제를 갖춘 글로벌 업체와 경쟁하기가 힘들다. 업계는 범정부 차원에서 전자정부 등 서비스와 공동 진출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 정보통신망 구축 관련 지침을 신기술과 공정경쟁 유도, 적정가격 책정에 맞춰 현실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한 중계기 업체 임원은 “1차 협력사가 무너지면 2차, 3차 협력사도 연쇄적으로 무너져 산업 전체가 자생력을 잃고 결국 외산 제품에만 의존하게 된다”며 “정부, 민간 생태계 정점에 있는 통신사가 국내 업체를 살리기 위한 시장 만들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내 통신장비 업계 다중고/자료:업계종합>
안호천기자 hca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