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베트남에 거주하는 한인 소녀가 뉴욕 카네기홀에서 피아노 연주회를 열었다. 이제 갓 십 대 중반을 넘어선 소녀가 완숙한 연주자도 평생에 한 번 설까 말까 한 무대에 단독으로 올라 세간의 이목이 쏠렸다. 명망만큼이나 연주자를 까다롭게 심사하는 것으로 소문난 카네기홀이 단 4개월 만에 공연을 승인했다는 사실도 화제가 됐다. 하지만 더 놀라웠던 사실은 연주자가 독학으로 피아노를 배웠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베트남으로 이주한 소녀는 전문 레슨은 고사하고 동네 학원조차 다니기 어려운 형편이었다고 한다. 그때 소녀에게 스승이자 동료가 되어준 것이 유튜브(무료 동영상 공유 사이트)였다.
세계적인 대가의 손놀림을 따라 하며 기교를 연마하고 악보를 해석하고 볼륨을 크게 틀어놓은 동영상을 오케스트라 삼아 협연하듯 연습한 실력으로 카네기홀에 선 것이다.
바야흐로 지식의 시대가 찾아왔다.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지식에 도달할 수 있는 사회가 열렸다는 뜻이다.
KAIST도 지난 2013년부터 온라인 공개 강의 사이트인 코세라와 협약을 맺고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강의를 개설했다. 배움에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KAIST 학생과 똑같은 수업을 듣고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
어디에 살고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가려 묻지 않는다. 그저 원하면 되는 것이다.
과거의 지식은 어땠는가? 글을 아는 사제만이 영위한다거나, 대학 담장 안에 입성해야만 맛볼 수 있는 일부만의 것이 아니었던가?
현대가 낳은 초고속 인터넷망은 소수 영역 속에 고여 있던 지식을 전 세계로 흐르게 했다. 교육과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높아지는 등 배움에 대한 인식이 바뀐 영향도 크겠지만, 지식 진입 장벽을 낮춘 일등 공신은 단언컨대 과학과 기술일 것이다.
사회는 발달하는 과학기술을 좇아 변화한다. 그 엄청난 속도와 거대한 영향력을 가늠해본 적이 있는가? 혹시 이 대단한 힘을 특정 국가가 독점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정보와 지식과 기술을 통해 창출되는 부(富)가 편중되면 세계 빈부 격차는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해질 것이다.
정보와 지식을 독점한 국가들이 편향된 시선으로 과학기술 발전방향을 조망한다면 아마도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그 답을 찾기 위해 오는 10월 대전서 전 세계 민·관·학·연을 아우르는 과학계 정상들이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벌인다. 경제·사회·환경 등 21세기 인류가 당면한 여러 문제를 과학 기술을 통해 해결할 방안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과학기술 지향점을 논하고 지역 간 격차를 해소하는 것, 모두가 더 잘 살기 위해 포용적이며 지속적인 발전 방향을 모색한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과학기술 시대 동반성장을 논의하는 자리다.
세계 각국 과학 정상들은 그 자리에서 상생의 철학을 담은 선언문이 발표될 예정이다. 향후 10년간 과학기술계 공동 목표가 될 이 원칙은 앞으로 전 세계 사람들에게 ‘대전 선언문’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이번 회의 주제인 ‘과학기술혁신을 통한 공동의 미래창조’는 우리나라가 주도적으로 개발해 제안한 가치다. 산골 소녀가 하버드와 MIT 강의를 듣고, 습도는 높지만 강수량은 부족한 지역에 공기 중에 떠다니는 수분을 채집하는 장비를 설치해 마실 물을 만들어내는 그런 변화, 기술의 혜택에서 소외되는 사람 없이 모두가 고르게 발전할 수 있는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자는 권유다.
대한민국은 이 가치를 앞장서 공여하는 책무를 수행하게 됐다. 이 의미 있는 일에 국민적인 관심과 성원이 보태진다면 더욱 훌륭하게 제 역할을 감당해낼 수 있을 것이다.
강성모 KAIST 총장 president@kais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