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싸고 좋다고 외산 제품을 쓰지만 국내에서 장비 조달이 어려워지면 그 피해는 결국 고객사에 돌아갑니다. 하나 둘씩 업체가 사라지면 종국에는 산업 전체가 무너지는데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
지난달 말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나온 한 중견 통신장비 업체 임원의 넋두리다. 그는 국내 통신장비 시장에 ‘스노볼 효과’가 시작됐다고 경고했다. 스노볼 효과는 눈덩이가 점점 커지듯 작은 변화가 커다란 변화를 유발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금융업 복리처럼 좋은 쪽으로 발생하면 괜찮지만 나쁜 쪽일 경우 상황은 심각해진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 통신 강국을 자처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고사위기에 직면한 통신장비 산업이 자리하고 있다. 이동통신사 발주량 급감과 고질적인 갑의 횡포, 체계적이지 못한 육성책으로 모든 업계가 고통의 나날을 보낸다. 이들은 지난해부터 수익이 줄기 시작해 올해 1분기엔 최악의 상황이었다고 털어놨다.
중계기, 전송장비 등 아직은 경쟁력을 가진 분야 업체가 무너지면 값비싼 로열티를 지불하고 외산 제품을 사용해야 한다. 한 때 세계 시장 80%를 차지하다 지금은 역으로 수입하는 상황에 처한 광통신소자 분야 광분배기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다.
통신장비를 연구하는 한 국책연구원은 “국내 통신장비 시장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업계가 숨을 쉴 수 있도록 이동통신사가 배려를 해야 한다”며 “통신사가 신규 투자를 하지 않는 이상 뾰족한 대책은 없다”고 지적했다. 자금력을 가진 통신사가 적극 움직여야 통신장비 업계가 자생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얘기다.
변화는 공공분야에서 먼저 일어나야 한다. 사물인터넷(IoT)을 비롯한 신기술 도입과 공정경쟁 유도책이 필요하다. 특정업체에만 유리한 제안서상 ‘알박기’, 가격 후려치기 근절 대책 마련도 시급하다. 체계적이고 범부처적인 해외수출 지원책도 마련해야 한다.
최근 국방부가 통신장비업계와 간담회를 열고 국내 장비 사용률 상향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통신장비를 바라보는 기본적 구매 철학이 달라지는 첫 걸음이기를 기대한다.
안호천기자 hca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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