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초 당시 최순달 한국전자통신연구소장은 이른바 ‘시분할 전자교환기(TDX) 혈서’를 정부에 보냈다. ‘연구원 일동은 신명을 바쳐 TDX 개발에 최선을 다하되 실패하면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는 배수진의 각서였다. 그 시절에 천문학적인 액수인 240억원의 연구개발비를 받기 위해서는 정부에 확신을 심어줘야만 했다.
연구원은 3년 만에 TDX 개발에 성공해 교환기 부족에 따른 전화 적체를 말끔히 해소했다. 이후 한국은 통신 선진국에 진입할수 있었다. 하지만 연구개발, 생산을 담당하던 삼성, 대우, LG, 한화 등 4개사가 사업을 철수하면서 TDX는 중소기업 위주 산업으로 전락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다른 통신장비 업계도 마찬가지다.
데이터가 매년 늘어나면 통신장비 산업도 활황이 돼야 하는데 업계는 어려움에 처해 있다. 품질문제라면 우리나라의 인터넷 품질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 최고 수준이다. 국산 제품이 이동통신사에 사용되고 있는걸 보더라도 품질 문제는 없다. 중국의 저가정책과 북미와 속도경쟁에서 다소 밀리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보는 우리 장비로 지켜내야 한다는 점에서도 통신장비 산업은 포기해서는 안 된다.
2010년 10월 미국 의회는 화웨이가 스프린트의 통신장비 입찰 참여에 우려를 표명했다. 2013년 7월 마이클 헤이든 전 국가 안보국 국장이 화웨이 등이 스파이 활동에 연루된 증거를 갖고 있다고 발표했다. 2013년 12월 미 정부가 한국 통신사 4G 네트워크에 도입되는 화웨이 장비가 주한 미군 도청에 이용될 수 있다고 우리나라 보안 문제를 미국이 이야기 하는 형편이 돼버렸다. 실제 미 하원은 이를 토대로 중국 등 의심 가는 기업이 통신, 전력 등 국가 핵심 기반 시설 사업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배제하는 법안을 개정하기도 했다.
미국 하원 정보위원회는 화웨이 통신 장비에 대해, ‘미국의 안전보장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의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이동통신사업자에 화웨이와 거래 중단을 권고했다. 호주 역시 동일한 이유로 화웨이 기술을 자국 통신 인프라에 도입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2013년 6월 NSA의 무차별적 정보수집 활동을 세계에 알린 에드워드 스노우든의 폭로를 근간으로 출간된 ‘No Place To Hide’ 내용 중 다음과 같은 구절이 눈에 뛴다.
“미국이 세계를 상대로 중국 감시를 경고하는 이유 중 하나는 중국장비는 신뢰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중국장비가 미국장비를 대체하는 상황을 막는 것은 NSA의 수집범위가 제한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중국산 네트워크 장비는 경제적인 경쟁대상일 뿐 아니라 감시 차원에서 경쟁대상이다. 누군가 미국산 장비대신 중국산 장비를 사면 NSA는 엄청난 양의 통신활동에 대한 중요한 감시 수단을 잃는다.”
우리보다 통신기술력이 낮은 베트남조차 정보안보를 이유로 자국산 장비를 개발해 사용하고 있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제4의 국토인 정보 안보를 위한 정부의 결정을 기다려 본다.
김철수 인제대학교 컴퓨터공학부 교수(전 지식경제부 네트워크 PD) charles@inje.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