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를 하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 ‘우리 것’이 없다는 것이다. 개념도 그렇고 용어도 그렇고 실제로 제품도 그렇다. 전부 ‘그들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들이 만들어 놓은 규칙과 기준과 표준에 우리를 맞추는 데 급급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힘들여 겨우 따라 가보면 그들은 다시 저만큼 가 있다. 그러니 우리는 항상 뒤처져서 갈 수밖에 없다. 우리가 IT에서 자랑하는 것이 국내 최초 도입했다는 것, 제일 싸게 도입했다는 것, 도입 기간이 제일 짧았다는 것, 심지어는 도입 후에 제일 빨리 안정화했다는 것들이다.
한국 전쟁 후 세계 최빈국이었던 우리나라가 60여년 만에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에 육박하게 급성장했으니 우리 것을 만들 기반이나 시간적 여유가 있었을 리 없다. 정신없이 ‘잘살아 보세’를 외치면서 뛰어온 결과다. 앞에 뛰는 주자가 많이 있었으니 이들을 따라 잡기 위해서 남들 놀 때, 남들 쉴 때, 우리가 열심히 배우고 뛴 것은 사실이다. 이미 우리 앞에 그들이 있었기에 따로 우리 것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어떻게 만들지도 고민하지 않아도 됐다. 적어도 비슷하게 또는 조금 더 낫게 빨리만 만들면 됐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방향성 상실이다. 선두주자들을 거의 따라 잡고 나니까 어디로 어떻게 뛰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이전에는 전혀 고민하지 않았던 영역이고 요구받지 않았던 능력이다. 같은 방향에서 좀 더 빨리 뛰기만 하면 됐다. 벌써 우리 뒤에서 많은 주자가 우리를 뒤쫓아 오고 있다. 후발주자에게 따라 잡히지 않으려면 이제는 선두주자를 따라 잡고 치고 나가야 한다. 어디로 뛰어야 할 것인가. 여기에 아무도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든 경제든 문화든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 과거를 공부하는 것은 과거에서 교훈을 얻어 후회하지 않는 미래를 만들기 위함이다. 우리가 지금 과거에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미래에 대한 자신감의 결여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 주도적이지 못했다. 뭔가 베껴 오면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베낄 데가 없다. 그래서 자꾸 과거와 현재를 놓고 많은 논의와 논란이 있지만 이를 바탕으로 하는 긍정적인 미래를 구상해 내지 못하고 있다.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정말 명강의였다. 이 분 말씀이 우리가 이제까지 우리의 사상과 우리의 개념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그들의 것을 받아들이다 보니 항상 누가 더 원칙주의자인지를 놓고 다투게 됐다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만든 우리 것이 아니다 보니 항상 원리나 원칙의 해석이 분분해서 문맥을 놓고 서로 싸우게 됐다는 것이다. 내가 오랫동안 내심 찜찜해 하던 허전함이 확 드러나면서 다시 가득 채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을 따라가고 그들의 기준과 규칙과 원칙에 얽매이는 삶이 아니라, 나만의 나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강의는 ‘너는 너냐?’고 물으면서 끝났다.
우리 사회의 각종 이념 논쟁의 뿌리를 알았다는 일차적인 기쁨과 다시 ‘나는 나냐?`라는 화두에 대한 충격으로 오랜 시간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SeriCEO 과정을 만들고 주도하던 강신장님이 ‘오리진이 되라’는 책을 쓴 적이 있다. 그는 이렇게 서문에 썼다. “나는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오리진’과 그 ‘나머지’ 사람. 스스로 처음인 자, 게임의 룰을 만드는 자, 새 판을 짜는 자, 원조(기원)가 되는 자, 그리하여 세상을 지배하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창조하는 자, 그가 바로 ‘오리진’이다. ‘나머지’는 오리진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게임의 규칙 안에서 서로 피 터지게 싸우는 이들이다. 우리는 ‘나머지’의 범주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한동안 컴퓨터 게임에 빠진 적이 있었다. 몇 달 동안 새벽까지 게임을 했다. 재미도 있고, 한번 시작하면 컴퓨터를 이길 때까지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에는 이기기는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시간은 오래 걸린다. 그들이 게임을 힘들게 이기도록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내가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규칙 속에서 조종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내가 꼭두각시가 된 기분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녀석이 만들어 놓은 게임의 룰 속에서 몰입하고 흥분하고 좌절하는 내 모습이 불쌍하고 처량해 보였다. 그래서 바로 끊었다.
IT의 주요 구성 요소인 HW, SW, 애플리케이션에서 우리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 회사 애플리케이션이 왜 우리 것이 아니냐고 하겠지만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것을 일부 수정했을 뿐이다. 지금 유행하고 있는 빅데이터와 클라우드와 핀테크와 IoT에서도 우리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앞으로 우리는 그들이 만든 규약과 방법론과 솔루션을 또 부지런히 따라 가야 한다. 누가 먼저 우리나라에 들고 들어 왔느냐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언제까지 우리는 그들을 따라 가야만 하는가. 따라가는 것에 이미 익숙해 있고 이것을 ‘Do Not try to reinvent the wheel’이라고 한다면 언제 우리가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갈 수 있을까. 언제 창조경제가 우리나라에서 꽃 피울 수 있을까. 창조는 ‘나는 나다’에서 출발하지 않을까.
CIO포럼 명예회장(명지대 교수) ktlee77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