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신의 선물, 귀족의 음료, 민중의 술

김상미의 와인스토리 (1)

[칼럼] 신의 선물, 귀족의 음료, 민중의 술

’농부인 노아는 포도밭을 가꾼 첫 사람이 되었다. 그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은 채 자기 천막 안에 누워 있었다.‘ 성서 창세기전 9장 20절에서 21절 내용이다.

성서에도 와인이 언급될 만큼 와인의 역사는 길다. 하지만 와인을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개발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 대신 와인과 관련된 설화는 제법 많다. 그 가운데에는 고대 페르시아 잠시드(Jamshid) 왕과 관련된 재밌는 이야기도 있다.

잠시드 왕은 포도를 무척 좋아해서 포도를 늘 항아리에 담아 창고에 보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은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후궁 한 명을 내쫓았다. 절망에 빠진 후궁은 왕의 창고로 들어가 ‘독’이라고 써진 항아리를 찾았다. 그 항아리에는 부글거리며 발효 중인 포도가 들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발효를 몰랐기 때문에 포도가 독으로 변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후궁은 자살을 결심하고 내용물을 들이켰지만 죽기는커녕 기분 좋은 잠에 빠졌다. 깨어난 후궁은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왕은 매우 기뻐하며 후궁을 용서했고 페르세폴리스에서 생산되는 모든 포도로 와인을 만들 것을 명했다고 한다.

이 전설대로 잠시드 왕 시대에 와인을 발견했고 와인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 훨씬 전에 와인을 담았던 유물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가장 오래된 유물은 기원전 6000년 경 토기로 흑해 동쪽에 위치한 조지아(Georgia)에서 발굴됐다. 지금까지 발견된 신석기 시대 유물을 추적해보면 와인은 기원전 8000년부터 4000년 사이 신석기 시대 트랜스코카시아(Transcaucasia)에서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트랜스코카시아는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이란 북부 그리고 터키 동부를 아우르는 지역으로 와인은 이곳으로부터 이집트, 그리스, 중국 등지로 뻗어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고대인들은 와인을 어떤 용도로 마셨을까? 적어도 지금 우리가 즐기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맘껏 즐기는 음료는 아니었다. 기록에 따르면 청동기 시대에 와인은 주로 종교 행사에 쓰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와인에 취해 몽롱해지는 기분을 신에게 다가가는 것이라 믿었다고 한다. 고대에도 맥주가 있었지만 맥주와 달리 와인은 신성한 음료였다. 맥주는 곡식을 빻아 물과 섞고 가열해서 만드는 ‘인간이 만든 음료’였지만 와인은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저절로 술이 되는 ‘신의 선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집트에서는 오시리스가, 그리스에서는 디오니소스가 포도주의 신으로 섬김을 받았다.

와인이 보편화된 것은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였다. 로마 시대에는 살균을 위해 물에 와인을 섞어 마셨을 만큼 와인이 필수품이었다. 로마는 도로를 닦아 와인을 점령지로 운반했고 점령지에 포도나무와 와인 만드는 기술을 전파했다. 이때 유럽의 주요 와인 산지 대부분이 개척됐으니 로마가 와인 발전에 미친 영향력을 실로 대단하다 할 수 있다.

이후 점령지의 와인 생산이 늘자 와인은 점령지에서 로마로 역수입이 됐다. 와인이 흔해지자 로마는 노예에게도 주당 5리터의 와인을 배급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와인 제조나 보관 기술이 미비했기 때문에 와인은 금방 시어질 수밖에 없었다. 맛있고 신선한 고급 와인은 귀족들이 즐겼고 식초가 되기 직전의 와인만이 민중의 차지였다.

로마가 멸망하고 유럽에 기독교가 자리잡으면서 와인의 더 이상 신성한 ‘신의 선물’이 아니었다. 기독교에서 와인은 예수의 피를 상징하지만 교회가 축성한 와인만 성스러운 존재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 교회와 수도원은 포도 재배와 와인 제조를 민중에게 전파했지만 고급 와인은 여전히 귀족과 성직자 등 상류층의 전유물이었고 민중은 나무통이나 가죽 부대에 담긴 비위생적인 와인에 만족해야만 했다.

18세기 들어 계몽주의 사상과 함께 과학이 발달하면서 발효 기술도 발전했고 유리병과 코르크의 생산도 시작됐다. 와인의 장기 보존이 가능해졌고 보르도(Bordeaux), 부르고뉴(Bourgogne), 모젤(Mosel) 등지가 고급 와인 산지로 부상했다. 사회 혁명으로 귀족이 몰락하자 그들을 위해 일하던 요리사들이 레스토랑을 열었고 도시와 상업의 발달로 떠오른 부유한 시민 계층인 부르주아지(Bourgeoisie)는 신선한 와인과 함께 고급음식을 즐기기 시작했다. 와인은 소장 가치가 있는 상품이 됐고 와인에 대한 식견은 높은 안목의 상징이 됐다.

와인은 이렇게 황금기를 맞는 듯했지만 19세기 중반부터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100년간의 긴 침체기를 겪어야만 했다. 병충해로 유럽의 포도밭 대부분이 황폐화됐고 미국에서는 금주령 때문에 밀주와 밀매가 성행했으며 1,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군납을 위해 질보다 양을 우선시할 수 밖에 없었다. 소비자들은 저급화된 와인으로부터 등을 돌렸고 대신 위스키 같은 증류주와 커피, 코코아, 차 같은 다양한 음료를 선택했다. 많은 농가들이 포도 농사를 포기했고 남은 와이너리들은 20세기 중반 품질 고급화를 이루고 소비자의 신뢰를 회복까지 수많은 땀과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이제 우리는 타고난 계급이나 축적한 부와 상관없이 개인의 취향에 따라 얼마든지 와인을 선택할 수 있는 와인 대중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지금이 있기까지 와인은 지난 8000년간 험난한 여정을 지나야만 했다.

우리에게 와인이 일상화된지는 이제 겨우 10여 년 남짓이다. 우리에게 와인은 무슨 의미일까? 누군가에게는 좋은 취미이고 누군가에게는 가끔 누리는 호사이며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과시하는 상징일지도 모른다. 첫 번째 와인 칼럼 주제를 무엇으로 할까 생각하다 와인의 긴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해보는 것은 어떨까 싶었다. 한 잔의 와인 속에는 긴 역사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역사는 농부나 양조가만이 아니라 정치가, 과학자, 소비자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와인의 역사를 이해하면 와인이 더 맛있다. 오늘도 와인 한 잔 앞에 놓고 그 긴 역사를 한 모금 머금어 본다.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필자소개/ 김상미

1990년 연세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우리나라 통신 1세대로 20여년간 인터넷과 통신 회사에 근무하였다. 음악서비스 멜론의 서비스기획팀장을 마지막으로 2005년부터 2013년까지 유럽에서 근무하며 와인을 좀 더 쉽게 접하게 되었다.

2012년 회사를 그만두고 와인에 올인, 영국 Oxford Brookes University의 Food, Wine & Culture 석사과정에 입학하였고 그녀가 쓴 ‘An Exploratory Study to Develop Korean Food and Wine Pairing Criteria (한국 음식과 와인의 조화)’는 석사논문으로는 이례적으로 2014 Global Alliance of Marketing & Management Associations (GAMMA) Conference 에서 소개 된 바 있다.

최근에는 영국 런던의 세계적인 교육기관인 Wine & Spirit Educational Trust (WSET)의 최고 등급인Diploma를 취득했다.

현재 주간동아에 와인 칼럼을 연재 중이며 KT&G 상상마당의 홍대 와 춘천 아카데미에서 와인을 가르치고 있다. 늘 한국인의 입맛과 음식에 맞는 대중적인 와인을 찾고 공유하는 일에서 가장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