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벽을 보고 이야기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슈퍼 갑의 위세를 보는 것 같아 씁쓸했습니다.”
최근 미래창조과학부 간담회에 참석했던 네트워크 장비업체 한 임원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좌절도 크다고 토로했다.
지난 15일 미래부는 제9차 ICT정책 해우소를 개최했다. 위기에 빠진 네트워크 장비산업 활성화 대책을 논의하는 장이었다. 모처럼 통신사 구매담당 임원과 장비업체 사장, 정책 당국자가 한자리에 모였다. 미래부 차관까지 직접 토론에 참여할 정도로 기대와 관심이 모였다.
통신사 한 임원 발언은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는 “가볍게 혁신하고 절약하면서 움직이는 회사가 있다. 이런 회사들은 조용한데 그렇지 않은 회사가 시끄럽다”고 발언했다. 한마디로 어려움을 호소하는 중소 장비업체의 토로를 ‘생떼’로 평가절하한 셈이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장비 안 칩세트는 다 외국 것인데 도대체 국산이라는 의미가 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최근 통신사와 장비업체가 협력해 국산 장비 경쟁력을 높이자는 지적에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냈다.
토론회에 참석했던 몇몇 장비업계 관계자들이 발끈했지만, 슈퍼 갑 앞에 큰소리를 내지 못했다. 행여나 타깃이 될까 두려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미래부 관계자들은 양쪽의 어정쩡한 상황을 그저 지켜볼 뿐 가타부타 끼어들지 못했다.
지금 우리나라 네트워크 장비업계는 벼랑 끝에 내몰렸다. 통신사 임원 말처럼 장비업계가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측면이 있다. 그렇지만 네트워크 장비업체가 과연 홀로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까. 세계 유수 장비업체도 통신사와 긴밀한 협력 없이는 지금의 기술력을 확보할 수 없었다.
공공 주파수를 쓰는 통신사업자는 공적 책무를 담당한다. 무조건 시장논리로만 내세울 수 없다. 우월적 지위를 내세워 중소업체를 겁박하는데 팔짱만 낀 정부도 한심하다. 미국 정부는 시스코 등 자국 장비산업 보호를 위해 중국 장비를 공공기관에서 사실상 쓰지 못하도록 했다. 중재자로서 정부 역할이 아쉽다.
안호천기자 hca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