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보르도, 첫 번째 이야기

김상미의 와인스토리 (2)

[칼럼] 보르도, 첫 번째 이야기

로마에게 와인은 필수품이었다. 질병 예방을 위해 물에 와인을 섞어 마셨기 때문이다. 로마는 점령지마다 포도 재배와 와인 생산을 전파했고 덕분에 유럽에는 로마 시대에 이미 주요 와인 산지가 자리 잡게 됐다.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어서 지금의 와인 산지가 로마시대에 개척됐다. 로마는 프랑스 남부 론(Rhone)과 랑그도크(Languedoc) 지방을 시작으로 북쪽으로 진군하면서 부르고뉴(Bourgogne)와 보르도(Bordeaux)를 개발했다. 특히 보르도는 지롱드(Rigonde) 강과 대서양을 이용해 영국으로 와인을 이송할 수 있다는 편리함 덕분에 로마인이 적극적으로 개척한 곳이다.

그런데 12세기부터 15세기까지 약 300년간 보르도는 잉글랜드(England) 땅이었던 적이 있다. 로마가 패망한 뒤 보르도 지방에는 아키텐(Acquitaine) 공국이 자리 잡았는데, 아키텐의 공녀 엘레노어(Eleanor)가 잉글랜드 왕과 결혼하면서 보르도 땅을 지참금으로 가져갔기 때문이다.

1137년 엘레노어는 열다섯의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아키텐 공국의 상속자가 됐다. 그녀는 곧바로 후견인이었던 프랑스 왕 루이 6세의 아들 루이 7세와 결혼했지만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아 결혼 15년만인 1152년에 이혼을 했다. 이후 곧바로 영국 귀족 헨리 플랜타저넷(Henry Plantagenet)과 재혼을 했는데, 그가 나중에 잉글랜드 왕 헨리 2세가 된 인물이다.

자국에서 와인 생산이 안되는 잉글랜드는 모든 계층에게 와인을 공급하기 위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서 와인을 수입했다. 1330년 기준 와인 1갤런 가격이 독일 와인은 6실링, 이탈리아산 베르나키아가 32실링으로 최고급이었던 반면 보르도 와인은 4실링에 불과했다고 하니, 보르도 와인은 서민을 위해 대량 수입하던 저급 와인이었던 셈이다.

당시는 메독(Medoc)과 생테밀리옹(Saint-Emilion)이 개발되기 전인데다가 포도 재배와 양조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보르도 와인은 색과 향이 약하고 타닌이 강한 거친 와인이었다. 잉글랜드에서는 보르도 와인을 클라렛(Claret)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불어로 흑장미를 뜻하는 클래레(Clairet)에서 왔다. 와인색이 장미색 정도였으니 당시 보르도 와인은 지금처럼 진하고 힘있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보르도는 잉글랜드라는 큰 고객이 생겨서 살림살이가 훨씬 더 나아졌던 모양이다. 잉글랜드에 저항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잉글랜드 지배하였던 300년 내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심지어는 자기들이 잉글랜드의 일부라고 여겼으니 말이다. 하지만 프랑스 왕은 유럽 최대 와인 산지인 보르도가 영국 땅인 것이 늘 불만이었다. 왕위 계승 문제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결국 영토를 되찾기 위해 프랑스 왕은 전쟁을 선포했고, 이것이 기나긴 백년전쟁의 시작이었다.

여기에서 백년전쟁 마지막을 장식한 잉글랜드 장군 존 탤봇(John Talbot)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그가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많은 샤토 탈보(Chateau Talbot) 와인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탤봇은 백년전쟁에서 많은 업적을 세운 사람으로 보르도를 포함한 프랑스 귀옌(Guyenne) 지방의 총독이었다. 그는 1449년 루앙(Rouen)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다가 프랑스 왕에게 다시는 프랑스를 향해 검을 들지 않겠다는 굴욕적인 약속을 하고 풀려났다. 1451년 보르도가 프랑스에 함락되자 보르도 주민들은 잉글랜드 왕 헨리 6세에게 자기들을 구해달라고 청원했다. 이에 헨리 6세는 탤봇을 다시 보르도로 보냈고, 탤봇은 기사로서 프랑스 왕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1453년 카스티용(Castillon) 전투에 무장하지 않은 채로 참전했다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샤토 탈보는 한 때 히딩크 감독이 좋아하는 와인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지만 이런 역사적 에피소드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인지 샤토 탈보 와인 레이블에 조그맣게 쓰여있는 말에 눈길을 주는 사람도 별로 없다. 레이블에는 ‘Ancien domaine du Connétable Talbot, Gouverneur de la Province de Guyenne 1400 – 1453 (1400-1453년 동안 기옌의 영주였던 총사령관 탈보의 옛 영지)’라고 적혀 있다. 프랑스 와인이지만 적군이었던 잉글랜드의 장군을 기리는 것은 아마도 탤봇이 약속을 지킬 줄 아는 진정한 기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카스티용 전투를 끝으로 백년전쟁이 잉글랜드의 패배로 끝나자 잉글랜드는 보르도에서 수입하는 와인에 높은 관세를 붙이기 시작했다. 이는 보르도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와인 수입상에게도 큰 타격이었다. 잉글랜드 수입상들은 보르도를 대체할 만한 와인 산지를 찾아 나섰고 그렇게 개발된 곳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이다. 백년전쟁의 결과가 유럽의 새로운 와인 산지 개척을 가져온 셈이다. 한편 보르도의 와인산업은 잉글랜드를 잃고 큰 위기에 봉착했지만, 이는 고급와인으로 한 단계 발전하기 위한 일보 후퇴였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회에서 계속하도록 하겠다.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필자소개/ 김상미

1990년 연세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우리나라 통신 1세대로 20여년간 인터넷과 통신 회사에 근무하였다. 음악서비스 멜론의 서비스기획팀장을 마지막으로 2005년부터 2013년까지 유럽에서 근무하며 와인을 좀 더 쉽게 접하게 되었다.

2012년 회사를 그만두고 와인에 올인, 영국 Oxford Brookes University의 Food, Wine & Culture 석사과정에 입학하였고 그녀가 쓴 ‘An Exploratory Study to Develop Korean Food and Wine Pairing Criteria (한국 음식과 와인의 조화)’는 석사논문으로는 이례적으로 2014 Global Alliance of Marketing & Management Associations (GAMMA) Conference 에서 소개 된 바 있다.

최근에는 영국 런던의 세계적인 교육기관인 Wine & Spirit Educational Trust (WSET)의 최고 등급인Diploma를 취득했다.

현재 주간동아에 와인 칼럼을 연재 중이며 KT&G 상상마당의 홍대 와 춘천 아카데미에서 와인을 가르치고 있다. 늘 한국인의 입맛과 음식에 맞는 대중적인 와인을 찾고 공유하는 일에서 가장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