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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기기가 보편화되고 기술 발전이 빠르게 이뤄지면서 전자 폐기물도 함께 급증하고 있다. 최근 유엔환경계획(UNEP)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불법으로 투기·거래된 전자 폐기물이 매년 4000만톤 이상”이라며 “국제사회 차원의 대책이 시급하다”고 촉구했다.
UNEP에 따르면 매년 불법 거래되거나 무단으로 버려지는 전자 폐기물은 무려 190억달러(약 20조7708억원) 규모다. 폐기물을 버리는데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선진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불법 매매되는 게 대부분이다. 이렇게 개도국으로 흘러들어간 전자 폐기물은 다시 버려진다. UNEP는 향후 2년 내 전자폐기물이 5000만톤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일리노이대학 연구진이 전자 폐기물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열기반(heat-triggered) 자가 파괴 전자기기를 개발했다. 완제품 속 부품에 부착하면 스스로 녹게 만든다. 원재료를 추출할 수 있어 재활용이 되고, 원격에서 조종해 파괴 기능을 활성화시킬 수도 있다.
스콧 R. 화이트 일리노이대 우주항공공학 교수 연구팀은 친환경적으로 쓸 수 있는 전자기기나 소재 수명을 늘려 스스로 고치는 기기를 오랫동안 연구해 왔다.
그는 “물질 재생 관점에서 기존 생각을 180도 바꿔 생각해봤다”고 말했다. 이 연구팀은 물에 녹는 기기를 만드는 중이었던 존 A. 로저스 소재과학 및 엔지니어링 교수가 이끄는 연구진과 협업했다. 존 A. 로저스 연구진은 해당 분야 선두주자다.
두 연구팀은 자외선(UV)과 열, 기계적 스트레스 등을 포함해 어떤 자극으로 기기를 파괴할지 머리를 맞댔다. 제조업자가 쓸모없게 된 기기나 매립지에 묻힌 기기에 쓰인 소재를 재활용하게 하자는 게 최대 목표였다.
연구진은 아주 얇고 휘어질 수 있는 소재 위에 마그네슘 회로를 프린트했다. 약산성 왁스를 한 방울 떨어트려 기기를 코팅했다. 기기에 열이 가해지면 왁스가 녹아 산(acid)을 방출했고, 이 산은 아주 빠르고 완벽하게 기기를 녹여냈다.
원격으로 이 반응을 일으키기 위해 기기 내부에는 무선통신(RF) 수신기(receiver)와 열 감응형(inductive heating) 코일을 탑재했다. 사용자가 신호를 보내면 코일이 뜨거워지기 시작해 왁스를 녹이고, 기기가 자동으로 파괴된다.
로저스 교수는 “화학적 특성을 활용하기 때문에 다양한 애플리케이션에 적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산의 농도나 왁스의 두께, 온도 등을 조절해 기기가 파괴되는 속도도 제어할 수 있다. 짧게는 20초에서 최대 몇 분정도면 기기가 녹는다. 왁스에 다른 소재를 입혀 융점을 조절, 녹는 단계를 조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다양한 소재가 적용된 복잡한 전자기기도 이 기술로 녹일 수 있다는 얘기다.
화이트 교수는 “각 소재를 파괴하지 않아 새 전자기기를 만들 때 재활용할 수 있다”며 “폭발 등이 아니라 친환경적 자극을 이용해 파괴를 유발하는 첫 번째 시도”라고 설명했다.
김주연기자 pilla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