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식민사관 극복과 글로벌 한국사 복원

[칼럼] 식민사관 극복과 글로벌 한국사 복원

1. 우리 역사의 복원

해방 후 60년이 넘는 세월동안 우리나라는 짧은 기간에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극복하지 못한 과제가 있다. 바로 “식민사관”으로서 우리 세대가 후세에게 물려줘서는 안되는 부정적 유산이다. 식민(植民)사관이 그것이다. 나무를 심는 것을 식수(植樹)라고 한다. 식민이라는 말은 대한제국 강점 후 한국으로 건너온 일본인들의 시각으로 한국사를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한국사는 대륙사와 해양사인데, 조선시대 후기 사대주의 유학자들과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반도사로 국한시켜 축소시켰다. 그래서 글로벌 한국사의 복원을 기원하며 일제의 식민사학이 어떻게 우리 현 시대에 영향을 미치는지 그에 따른 대안은 무엇인지 알아보기로 한다.

2. 식민사관의 문제점

이 역사관은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임나일본부설로 대표되며 아래의 지도 한 장으로 설명할 수 있다.

[칼럼] 식민사관 극복과 글로벌 한국사 복원

이 지도상에서 왼쪽의 것이 우리나라 역사학자의 ‘가야=임나관’이며 오른쪽 지도는 일본 극우파의 교과서 ‘임나=가라관’이다. 허무맹랑한 임나일본부가 재상륙한 것이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도 일본의 관점에서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라보는 그릇된 시각을 후세에게 교육하고 있다. 한 세기 전에 조선총독부에서 우리 역사 안의 시간과 공간을 축소하여 찬란했던 대륙사와 해양사를 배제하고 반도국가임을 강조한 사실이나 단군 조선부터 시작하는 우리 역사를 지워버리고 AD 4~5세기 경에 한국사가 시작되었다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 팽배하고 있다.

이 역사관의 문제점은 한국사의 무대를 반도사로 국한시킨 것으로, 한반도 북부는 고대 한사군, 남부는 고대 일본이 지배하는 임나일본부가 있었다고 해서 식민지로 시작한 역사로 만들어 놓았다. 철기 문화도 우리의 발달된 청동기 문화의 바탕 위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연나라 위만이 가져온 것처럼 교과서에 서술하고 있다.

일체의 사료적 근거가 없는 위만의 철기 문명설(외래 문명 도입)을 교과서에 싣고 있다. 일제 식민사관의 주요 이론 중 하나인 ‘한국사 정체성론’을 추종한 교과서다. 이는 후세를 교육하는 학계가 아직까지도 식민사관을 추종하고 있는 현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총론으로는 식민사관을 비판하지만 각론으로는 식민사관을 추종하는 일종의 사기술이 지금까지 통용되어 왔다. 동북아 역사재단의 예를 들어보자. 동북아 역사재단이 한국 고대사를 외국인에게 알리겠다면서 영어로 펴낸 총 6권의 역사서 중 고조선은 없고 대신 중국의 식민지라는 한사군은 존재한다. 고조선도 아니고 부여나 고구려도 아닌 한사군에 대한 영문책을 국고로 만들어 외국 공관과 도서관에 배포하겠다는 것이다. 이 분야는 마치 조선총독부가 지금도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정도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역사관은 옛날부터 이러했을까?

조선시대와 식민통치 기간을 제외하면 상고시대부터 우리는 천손의 자손이며 중국과도 대등한 경쟁을 하던 자주적인 세계관을 유지해왔다.

만주에 내몽골 등 고조선 유적을 살펴보면 고조선 산성(적성, 돌을 쌓아 만든 성)과 천제(하늘에 제사)를 지낸 유적이 보인다. 성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손의 개념이 유적으로 남아있고 광개토 대왕 비문, 중국의 사서 등에서 고구려인의 자주적 천하관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은 북부여에서 나와 고구려를 건국할 때 “나는 황천의 아들이다”라면서 “나를 위해서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은 떠오르라”고 명령했다. 그랬더니 “말씀에 응하여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이 떠올랐다.”라고 광개토대왕릉비는 기록하는데, 이는 중국기록에도 일찍이 인용했던 이야기이다. 위 촉 오로 나뉘어있던 3국을 수나라가 통일하자마자 고구려는 병기를 수선하고 곡식을 쌓는 것으로 막고 지켜낼 방책을 삼았다(삼국사기, 평원왕 32년, 590)는 구절에서 수당전쟁은 서로가 천자임을 자부하는 수나라와 고구려의 전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하늘아래 천자가 둘 일수 없다는 주인의 역사관을 가진 두 나라의 전쟁이었다.

고려 후기 조선의 유학자들이 사대주의 사상에 의해 기자 조선을 한반도 역사의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그래서 중국에서 왔다는 기자의 묘를 14세기에 평양에 세우는데, 조선 들어서 유학 사대주의가 강화되면서 기자도 더욱 중시되었다. 그러나 기자는 서기전 12세기 경의 인물이므로 그가 평양에 데뷔한 것은 사후 2600여년 후의 일이었다. 사기 주석에는 기자의 무덤이 지금의 중국 하남성 상구(은나라 언덕)인 양국 몽현에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조선 총독부에서는 한국의 고대사를 반도사에 가두기 위해 조선의 기자 숭배를 이용하였다. 또한 연나라에서 온 위만조선을 고조선의 시작이라고 주장했으며 한반도 남부에는 신라, 고구려, 백제는 서기전 1세기가 아니라 그 수백 년 후에 건국되었다고 주장했고, 한반도 남부는 신라와 백제가 아니라 삼한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아무런 사료적 근거도 없이 ‘임나=가야’를 주장해서 한반도 남부를 고대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것이 일제 총독부사관이며 식민사관의 핵심 내용이다. 삼국 대신 삼한을 배치하고 ‘가야=임나일본부설’을 만들어 고대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3. 한국사의 복원(글로벌 한국사)

올바른 역사관의 첫발은 우리 한국사에 자긍심을 갖는 역사관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한국은 고려 때부터 비로소 반도국가가 되었지만 그 전까지 수천 년 동안은 대륙사였고, 해양사였다. 한국사의 무대는 만주대륙과 내몽골 및 외몽골 대륙까지 뻗쳐 있으며 고대 일본은 가야계와 백제계가 건너가서 만든 역사이다. 이제 식민사관, 즉 노예의 역사관을 버리고 선조들이 갖고 있던 주인의 역사관을 복원해야 한다.

다음 세대를 위해 우리 안의 식민사관을 해체하려면 우리 국민 세금이 친일사관을 가진 기관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막고 학계와 교육계에 글로벌 한국사의 복원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

역사는 역사학자의 연구지만 그들에게만 맡겨두지 말고 국민들의 냉철한 비판과 검증이 필요한 시기이다.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필자소개/이덕일 소장

한국사의 원형인 대륙성과 해양성을 재정립하고 있는 역사가이며 성역 없는 비판과 토론으로 열린 역사학을 지향한다. 현재와 미래의 가치를 치열하게 모색한 50여권의 저서가 있다. <우리안의 식민사관>,<잊혀진 근대, 다시 읽는 해방전사>,<근대를 말하다> 등의 근대사 관련 서적과 <조선왕을 말하다1,2>,<윤휴와 침묵의 제국>,<김종서와 조선의 눈물>,<조선왕 독살사건>,<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 <조선 최대 갑부 역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사도사제의 고백)>, <조선선비 살해사건>, <성공한 왕 실패한 왕> 등의 조선사 관련 저술은 조선사에 대한 시각을 바꿔 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