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정신과 광복 70주년
최근 우리는 나라밖으로부터 걱정스런 뉴스들을 접하고 있다. 내년부터 거의 모든 일본 중학교 사회과 교과서에 ‘독도는 일본 땅이며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는 내용이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 같은 내용의 기술은 작년 4월 초등학교 교과서에 이미 반영되었고, 이어 중학교까지 확대된 것이다.
일본 문부과학성은 4월 6일 교과용 도서 검정조사심의회를 열고 검정결과 18종의 교과서를 모두 합격 처리했다. 이번에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는 지리 4종과 사회 6종, 역사 8종 등이다. 이들 18종 중 15종이 독도를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적고 있으며 13종은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시모무라 하쿠분(下村博文) 문부과학상은 “자기 나라 영토를 아이들에게 올바르게 가르치는 것은 당연하다”며 “다케시마(竹島·일본이 주장하는 독도의 명칭)와 센카쿠(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 열도가 일본 땅이라는 기초적인 지식이 교과서에 기술된 것은 큰 진전”이라고 자평하고 있다. 일본 당국의 이런 과감한 조치들은 최근 아베정권의 우경화 열기와 맞물리는 것으로 우려의 수준을 넘고 걱정이 앞선다. 만약 지금의 중학생들이 10년 후에 성년이 되어 일본 자위대에 들어갈 경우에 그들은 학교에서 배운 대로 독도를 빼앗아 와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은연중에 청소년들에게 침략야욕을 갖게 하는 점이 무서운 것이다.
또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4월 3일 중국 지린성 공산당 기관지 길림일보에 따르면, ‘중국 창바이산(長白山) 문화’라는 이름의 책자는 서론에서 백두산(白頭山)을 중화(中華)의 성산(聖山)으로 적시하고, 중원의 한족(漢族) 문화가 중국 동부의 부여, 고구려, 발해, 선비, 거란 민족은 물론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의 문화와 융합해 독특한 창바이산 문화를 만들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장백산은 백두산의 중국식 명칭이다.
길림일보는 이 같은 책자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1980년대 이후 외국의 일부 학자가 민족이기주의적인 입장에서 경쟁적으로 중국 동북의 고대 민족을 그들의 국사에 편입시키고 예맥, 부여, 고구려, 발해를 조선 고대역사의 일부로 보고 있다”며 한국의 학자를 겨냥하고 있다. 또 ‘북방영토 의식, 수복해야 할 선조들의 옛 영토’ 등과 같은 주장이 (한국측에서) 제기되면서 백두산은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우선적으로 수복해야 할 옛 영토가 됐다는 식으로 비난을 이어가고 있다. 이는 적반하장으로써 우리로부터 비난 받아야할 자들이 도리어 우리를 비난하고 나선 격이다. 여기서 말하는 한국학자란 그들의 우군인 식민사학자가 아니라 한국 내 민족주의사학자들이다. 이러한 중국 측의 입장은 ‘동북공정’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장백산문화건설공정’의 결과이다.
이처럼 일본과 중국에서 건너온 두 가지 달갑지 않은 뉴스에 대해 국내 학자들은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물론 이런 문제에 대해 일일이 감정으로 대응할 필요는 없다. 다만 문제는 일본이나 중국의 주장에 대해 확실하게 답변할 준비가 덜 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특히 오랫동안 식민사학에 동조해온 국내 유명학자들의 경우에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있다. 놀랍게도 일본이나 중국이 주장하는 것처럼 한국에 불리한 역사문제는 그 근원이 식민사학과 맥을 같이 한다는 점이다. 광복 70주년이 다 되어도 식민사학은 청산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이기백은 자신의 『한국사신론』(1990년)에서 한국사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필요한 ‘우선적인 과업은 식민주의 사관을 청산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마치 본인은 식민사관을 모두 청산한 것처럼 자화자찬을 하고 있다. 그 책의 본문 중에는 식민사관의 핵심을 이루는 고조선의 평양중심설, 위만의 한반도 내재설 및 낙랑군의 대동강설 등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심지어 이기백은 한사군의 지배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정치적 자유를 고조선인들은 누리고 있었다”(41쪽)고 미화하고 있다. 이를 일제시기로 대체하면 “비교적 관대한 정치적 자유를 조선인들은 누리고 있었다”로 바꿀 수 있다. 한사군 때에 식민지배를 당한 고조선인들이 관대한 자유를 누린 것처럼 일제하의 조선인들도 관대한 자유를 누리며 식민지 백성으로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의미를 애써 담고 있다.
식민사학을 청산하지 않은 한국의 인문학은 암울하다. 요즘 인문학의 새 판짜기를 제기하고 있는데, 식민사학을 청산하지 않은 인문학의 새 판짜기는 불가능하다. 식민사학은 버린다고 해서 절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버리기 전에 그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비판이 선행되어야한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식민지가 만들어낸 잔재문화에 대한 철저한 곱씹기가 일어나야한다는 점이다. 극복하지 않으면 청산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민족사를 상처내고 흠집 낸 식민사학의 원조 학자(이마니시 류, 시라토니 구라키치 등)들의 이론을 우리는 극복해내야 한다.
예컨대, 시라토니 구라키치(白鳥庫吉)의 「단군론」은 일제침략 10년 전인 1894년에 나온 논문이다. 그는 이 논문에서 『삼국유사』를 요괴(妖怪)스럽고 황탄(荒誕)하다고 비난했고, 단군의 전설은 불설(佛說)의 가작담(假作談)으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불교가 조선에 도래한 것이 소수림왕(372년)이라면 단군의 전설은 그 후대인 장수왕대 이후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단군신화는 불교설화에 부회해서 황탄하게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것이 시라토니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송호정교수는 2002년에 『단군, 만들어진 신화』 라는 책을 썼다. ‘만들어진 신화’라는 말은 100여 년 전 시라토니의 논문 속에 있는 바로 그 말이다. 국내 식민사학은 원조 식민사학을 끊임없이 복제하여 확대재생산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 잘못된 고리를 끊기 위해 원조 식민사학의 논문들을 비판분석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의 성숙한 논문이 줄줄이 이어 나올 때, 우리는 비로소 식민사학을 청산했다고 말할 수 있다.
2. 고구려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세 가지 조건
고구려 이해의 조건으로 필자는 세 가지를 들고 싶다. 고죽국을 바르게 이해해야하고, 한사군을 바르게 이해해야하며, 북부여를 바르게 이해해야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고구려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것처럼 B.C. 37년에 갑자기 세운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고죽국을 알아보기로 한다. 일찍이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고죽국을 조선의 종족이라 하였고, “단군 때부터 조선의 울타리가 되어 중국을 막았다.”고 평가하였다. 이는 고죽국이 중국의 문화 속에 있었던 나라가 아니라, 고조선의 서부 강역에 있으면서 중국의 침략을 막아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윤내현 교수는 『고조선연구』에서 고조선의 거수국(제후국)을 요서지역의 거수국과 요동지역의 거수국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이 중에 요서의 거수국으로는 부여, 고죽국, 고구려, 예, 맥, 진번 등을 들고 있고, 요동의 거수국으로는 비류, 개마, 구다 등을 들고 있다. 윤교수는 고조선의 거수국인 고구려에 대해 말하기를, “고조선시대에 고구려는 난하(灤河) 하류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고구려, 고죽국, 기자조선, 한사군 등은 모두 같은 지역에 있었다”라고 했다. 결국 고조선 시대의 거수국에 고죽국과 고구려가 나란히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근거는 이미 일연의 『삼국유사』(고조선조)에 나와 있다. 이에 의하면, “고려(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인데, 주나라가 이곳에 기자(箕子)를 봉하고, 조선이라 하였다. 한(漢)이 3군을 설치했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일연이 이 구절을 「배구전」에서 인용하면서 고죽국의 위치를 황해도 해주로 주석을 달았고, 또 원문에도 없는 위조선(爲朝鮮:조선이라 불렀다)이라는 세 글자를 임의로 첨가하였다. 전자는 고죽국의 위치를 한반도 안으로 한정하는 오류를 범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위치까지도 한반도 안으로 묶어놓는 결과를 자초한 것이다. 또 후자는 임의로 ‘위조선(爲朝鮮)’이라는 말을 첨가하여 ‘기자조선’이라는 용어가 출현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고조선의 후대에 일어난 나라가 기자조선인 것처럼 와전하는데 일조하였다. 그럼에도 『삼국유사』는 고죽국의 터에 기자가 나라를 세우고, 한사군이 일어났지만, 결국 그 자리에서 고구려가 발흥하였다는 점을 은근히 시사해주고 있다.
다음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한사군(漢四郡)이다. 한사군이란 한(漢)나라가 설치한 네 개의 식민지 군현(郡縣)을 말한다. 한나라는 B.C. 202년에 건국하였고, 위만이 고조선의 변방에서 정권을 탈취하여 나라를 세운 것은 B.C. 194년이며, 이 위만정권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한사군을 설치한 것은 B.C. 108년~B.C. 107년인 것을 보면, B.C. 2세기의 요서(遼西)지역은 는 격변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조선열전)에는 “조선을 평정하고 4군을 삼았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한나라 유철(劉徹)이가 평정했다는 조선이란 단군의 고조선이 아니라, 고조선의 서쪽 변방에 있었던 ‘위만정권’이라는 점이다. 이 기록을 가지고 국사 교과서 등에는 위만이 단군의 조선을 계승한 나라였다고 하면서 고조선의 멸망연대를 B.C. 108년으로 적고 있는데, 이는 식민사관에 기초한 역사 왜곡일 뿐이다.
한사군에서 항상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낙랑군의 위치문제이다. 일제의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가 “낙랑군 수성현은 지금의 수안이다”라고 『사학잡지』(1910년)에서 주장하였고, 이를 이어 받아 이병도가 “자세하지 아니하나 지금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遂安)에 비정하고 싶다”라고 밝혔다. 이병도의 이 구절은 식민사학의 금과옥조가 되어 오늘날까지도 고조선의 심장에 박힌 대못처럼 낙랑군=대동강 유역(황해도 수안)이라는 학설은 변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위당 정인보는 한사군이란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는 유명무실(有名無實)한 것이라면서 낙랑의 치소를 요동의 험독으로 보았고, 윤내현 교수는 요서의 난하 유역이라 주장하여 이병도의 대동강 유역설은 더 이상 힘을 얻지 못하게 되었으나, 한국사학계는 변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후한서』(동이열전)에는 “무제(유철)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로써 현을 삼았다”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조선도 역시 단군의 고조선이 아니고 위만정권이다. 다시 말해 유철이가 위만을 멸한 다음에 그 곳에 군현을 설치했는데, 그 이름을 고구려라고 했다는 것이다. 고구려 이름을 가져다가 자기네 군현의 이름을 정한 것이다. 고구려뿐만 아니라 개마현이나 낙랑군도 다 우리의 개마국, 낙랑국의 이름을 훔쳐다가 멋대로 격하시켜 붙인 것이다. 이에 대해 신채호는 “한이 위씨(위만)를 멸망시키고는 그 토지를 조선에 돌려주지 않고 스스로 군현을 설치하고, 또한 그 군현의 이름을 조선 열국의 나라이름을 가져와서 지음으로써 조선열국을 모욕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분명한 사실은 고구려는 B.C. 108년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미 고구려국이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 이름을 빌려다가 땅 이름만 ‘고구려현’이라고 부르고 그 땅 자체는 고구려에 돌려주지 않고 한(漢)이 통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고구려와 한(漢)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고구려가 한사군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나, 고구려는 한사군에 저항하며 나라를 지켰다.
마지막으로 알아야 할 것은 북부여(北夫餘)이다. 고구려의 건국에 대한 진실은 이 북부여를 통해 비로소 알 수 있다. 북부여에 관한 기록은 광개토태왕릉비와 『환단고기』에 실려 있다. 먼저 1차 자료인 광개토태왕릉비문 서두에는 “고구려의 추모(주몽)왕은 북부여에서 나왔다”고 하여 그 출자(出自)를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또 『환단고기』(북부여기)에 의하면, B.C. 120년에 북부여는 해모수의 차남인 고진(高辰)을 고구려후(高句麗侯)로 임명했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당시 북부여와 고구려의 관계가 속민(屬民)관계에 있었음을 거듭 알 수 있다. B.C. 58년에 추모왕이 나라를 세움으로써 고구려는 북부여에서 독립된 관계를 갖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북한의 손영종은 『고구려사』(1990년)에서 고구려의 건국을 B.C. 277년으로 끌어 올렸다. 이는 그동안 고구려의 역년을 700년설, 800년설, 900년설 등으로 보아온 것에서 처음으로 900년설을 뒷받침해주고 있어 주목된다.
3. 광개토대왕릉비와 일제의 비문왜곡
광개토태왕릉비는 장수왕 3년(AD 414)에 건립된 동북아시아에서 최고 최대의 비(碑)이다. 높이 6.39m에 원래 1802자가 새겨 있으나 깨진 글자도 있다. 비신은 응회암이고, 받침돌은 화강암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 비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1445년에 지은 『용비어천가』 제39장에 동쪽 황성(皇城)을 설명하는 주석에 이르기를, “평안도 강계부 서쪽으로 강을 건너 140여 리에 넓은 들판이 있는데, 그 가운데 오래된 성이 있다. 사람들은 ‘대금황제성(大金皇帝城)’이라고 불렀다. 성 북쪽 7리에 비석이 있고, 또 그 북쪽에 석릉 두 개가 있다.”라고 했다. 이 대금황제성에 있는 큰 비석을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대금비’(大金碑)라 칭했다. 그러던 중 이 비가 재발견된 것은 1876년으로 중국인 관월산(關月山)에 의해서였다. 그 후 1884년 일본 육군참모본부 정보원 사카와 가게이키(酒勾景信)라는 중위가 만주 지역을 정탐하다가 이 비를 발견하여 본국에 탁본을 보냈고, 일본 군부 세력은 비밀리에 이를 연구하여 1889년에 『회여록』 제5집을 통해 「고구려 고비문」을 발표하였다. 이 때 활용된 탁본이 소위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다. 1959년 일본인 내부에서조차 ‘변상(變相)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고, 이어 1972년 재일동포 이진희에 의해 부분적인 개작(改作)설이 제기되었다.
이런 비문조작설이 퍼지기 오래 전에 중국과 한국의 초기연구자들은 일본의 쌍구가묵본을 의심 없이 대본으로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중에도 위당 정인보는 독창적인 주장을 내놓았고, 그에 맞게 빠진 글자를 보결하였다. 그 뒤 일본의 비문조작설이 국내외 학계에 널리 알려지면서 비문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했다.
특히 비문의 신묘년 기사(391년의 사건)를 놓고 한·일 양국 간의 논쟁은 팽팽하다. 문제의 기사를 ‘신묘년 기사’라고 통칭하는데, 다음의 한 문장에서 비롯된다.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 )( )新羅以爲臣民’
일본은 이 문장을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서 백제와 신라를 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는 1889년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가 처음으로 주장한 해석이다. 민족사학자 위당 정인보는 이 문장을 ‘왜’가 아닌 ‘고구려’를 주어로 하여 ‘왜가 신묘년에 고구려를 침략하여 왔으므로 고구려가 공략하여 왜를 무찔렀다’고 해석해 요코이의 해석을 반박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이 구절에 대해 특별한 언급이 없다. 반면에 『환단고기』(고구려본기)에는 “백제는 앞서 왜와 은밀히 내통하여 왜로 하여금 잇달아 신라 국경(강역)을 침범하게 하였다. 이에 태왕께서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나갔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신묘년 기사를 필자가 나름대로 재정리하면,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와 같이 단군의 오랜 족속민이다. 고조선 이후 고구려가 오래 전부터 조공관계를 유지해 왔다. 신묘년(391)에 왜적이 (신라를) 내침(來侵)하므로 바다를 건너 (왜를) 격파(擊破) 하였으나 백제가 (왜적과 연합하여) 잇달아 신라의 국경(國境)을 쳐서 (자기의) 신민(臣民)으로 삼으려 하므로 영락 6년 병신년(396)에 태왕(太王)은 몸소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신라를 보호하기 위해) 왜적(倭賊)과 백잔(百殘)을 토벌(討伐)하였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지금도 일본은 광개토태왕릉 비문을 왜곡 해석하여 소위 ‘임나일본부설’을 끈질기게 주장하고 있다. 일본이 광개토대왕릉 비문을 5년 간 비밀리에 연구한 이유는 바로 조선 정벌의 명목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은 비문을 왜곡하여 4세기 후반에 왜가 한반도 남부지역에 진출해 백제, 신라, 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에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어 직접 지배하였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정당화하고 있고, 현재의 일본 교과서에도 그대로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의 왜곡된 해석에도 불구하고 국내 학자들은 강하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식민사학이 뿌리 깊게 내려져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라는 국명은 670년에 나왔는데, 이미 4세기에 일본의 부(府)를 한반도에 두었다는 것은 거짓말 역사의 극치를 보여준다.
위당 정인보는 5천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조선의 얼’로 보았다. ‘얼’은 주체적인 자아이자, 보편적인 인간의 고도리이며, 참과 거짓을 판단하는 가치의 척도라 정의하였다. ‘얼’로써 고조선의 역사를 규명하였고, 한민족의 근본을 ‘얼’의 역사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고조선의 단군역사를 신화가 아닌 인간의 주체적인 역사로 편입하였다. 또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이라는 식민사관의 체계를 부정하고, 고조선-부여-고구려라는 새로운 얼의 역사체계를 세웠다. 이것이 정인보의 얼사관이다. 여기에 우리는 동경대학의 『삼국유사』 간본에서 이미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이마니시 류(今西龍)에 의해 철저하게 부정당하여 자취를 감추었던 석유환국(昔有桓國)의 역사를 바로 찾아 세워야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5천년의 얼’을 ‘9천년의 얼’로 확장하는 일이 우리가 지금 해야 할 과제이다. 일제가 만들어준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일은 우리의 9천년 얼사관을 다시 확립하는데 있다. 식민사관은 역사를 단절시키는 일을 자행하지만, 얼사관은 역사의 끊임없는 연속을 통해 인간 자아의 완성을 이루어간다.
이제는 특정한 역사학자에 의지하지 말고 시민들이 나서서 역사의 진실을 찾아내 지키는 수밖에 없다. 모름지기 역사의 정의는 깨어난 시민의 힘으로 이루는 것이다.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필자소개/이찬구 국장
성균관대 졸업 후 大山(김석진)선생 문하에서 한문 수학, 2005년 대전대 박사학위 취득(東洋哲學) ([東學의 天道觀 硏究]-有機體哲學의 觀點을 中心으로) 2010 한국철학사전편찬위원회 집필위원, 한국 신종교학회 상임이사이다. 저서로는 ‘인명용 한자사전’, ‘천부경과 동학’, ‘주역과 동학의 만남’, ‘채지가 9편’, ‘돈:뾰족돈칼과 옛 한글연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