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태의 IT경영 한수] <73> 소통에 대한 오해

[이강태의 IT경영 한수] <73> 소통에 대한 오해

우리는 사회적 문제만 생기면 그 원인으로 소통 부재를 꼽는다. 사람들 사이에서 생기는 문제는 대화로 잘 소통하면 못 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그렇게 모든 문제의 해법이고 만능키와 같은 소통을 왜 잘 안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국어사전을 찾아 봤다. 소통이란 막히지 않고 잘 통함 또는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을 말한다. 어찌 보면 우리 모두 다 알고 있는 뜻이고 정의다. 그런데 이게 왜 어려운 것일까? 왜 지도자, 경영자라는 사람이 소통 이미지 보다 불통 이미지를 갖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 모두가 간단하게 소통이라고 얘기하지만 그 이면에 뭔가 다른 복잡한 의미를 감추고 있지는 않은가?

소통은 우선 상대를 인정하고 만나고 대화하고 공감하고 합의하고 실행하는 구성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구성 요소 가운데 하나라도 없으면 그건 진정한 소통이 아니다. 이런 구성 요소들이 순환하면서 몇 차례 돌아 가야 ‘아! 좀 소통이 되는구나!’를 서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풀어 놓고 들여다 보면 소통이 쉽지 않다는 것을 금방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소통 좀 합시다’ 하는 것은 ‘나를 대화 상대로 인정해 주고 나를 좀 만나 주고 나의 얘기를 좀 경청해 주고 내 얘기에 공감하고 내가 해 달라는 대로 좀 해 주세요’ 하는 긴 얘기를 그저 ‘소통 좀 합시다’라고 운을 떼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 서로 뜻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나는 만남도 많다. 달리 표현하면 서로 불통을 확인하는 소통이 많다는 것이다. 흔히 정치가들이 밥만 먹고 헤어지면 뭐하냐면서 서로 안 만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만나서 사진 찍고 밥 먹고 그리고 헤어지면서 서로에게 유익했고 앞으로 자주 만나기로 했다고 하는 모임들이 대게 이런 종류다. 당연히 그런 모임은 서로 만나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두 번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주위에서 문제들만 생기면 정치 지도자의 소통을 문제 삼는다. 서로 만나서 솔직하고 진솔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아마도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는 목표는 같은데 접근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서로 공감하고 합의하고 뭐 그렇게 될 거라고 믿는다. 정치가들이 서로 안 만나기 때문에 불협화음이 생기니까 서로 만나서 끝장 토론하면 못 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그렇게 당연하고 꼭 해야 될 일들을 왜 안하고 삐그덕거리는 모습을, 서로 불편한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 주고 있을까?

회사에서도 직원들이 내 놓고 얘기는 안 하지만 회사의 모든 문제는 결국 소통의 부재라고 생각 한다. 경영자와 직원간에, 임원과 임원간에, 부서와 부서간에, 회사와 노조간에 진솔한 대화가 없고 그래서 소통이 잘 안되고 그래서 회사가 잘 안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회사가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사장이 주주나 직원에게 솔직하게 터 놓고 어렵다고 얘기하면서 협조를 요청하고 잘 되면 잘 되는 대로 투명하게 얘기하면 극복하지 못할 문제가 어디 있냐고 생각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가정에서도 소통은 잘 하고 있는가? 부모님과, 부부간에, 자녀들과 소통이 잘 되던가? 자기는 웬만큼 소통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마도 다른 가족은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자기들도 잘 안되고 가정에서, 회사에서 조차 잘 안 되는 소통이 사회적으로 쉽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애초부터 환상이고 무리 아닌가?

본질적으로 소통이 잘 될 때와 잘 안 된다고 할 때의 차이를 들여다 보면 결국 내 의견을 들어 줄 것이냐 안 들어 줄 것이냐의 전제에 달려 있다. 상대 의견을 듣고 가능한 그 의견을 존중하고 그 뜻대로 해 주겠다는 생각보다는 만나서 내가 설득하고 내 뜻대로 상대를 이끌어 보겠다고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서로 소통이 어렵다. 아니 만나는 것 조차 어렵다. 상대가 내 말을 들어 줄 것이라는 어느 정도의 확약이 있어야 만날 수 있는데 그런 호락호락한 상대가 몇이나 되는가? 그러니 소통 이전에 만나기 조차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소통이 잘 되기 위해서는 우선 내 뜻보다, 내 생각보다 상대의 뜻과 생각이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전제되지 않는 소통은 소통이 아니라 일방적 설득이고 지시고 강압이 될 뿐이다. 상대에 대한 존중은 나를 낮출 줄 알아야 가능하다. 나를 낮추지 않으면서, 내 몫을 희생할 각오가 없으면서 상대를 존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쩌다 한번 자기도 잘 모르고 그렇게 할 수는 있어도 두 번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래서 소통이 어려운 것이다. 모두들 ‘쉽게 만나서 소통 좀 하지!’라고 얘기하지만 그 이면에는 복잡한 셈법이 있고 전제 조건이 있고,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이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특히 권력 있고 좋은 학벌에 말 잘하고 리더십 있고 아는 것 많고 사회적 영향력 있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낮춰야 하는 데 그게 어찌 쉽게 되는 일인가?

정치는 인물이 아닌 시스템으로 더 체계화되고 사회나 기업의 경영이 더욱 원숙해 지고 개인들도 더욱 겸손해지지 않으면 앞으로도 우리 사회에서 소통 이미지의 지도자나 경영자는 찾아 보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KT Lee’s Law는 “소통은 쉽고 언제나 아무하고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무지 어려운 것이고, 어렵다고 생각하고 상대에 따라 준비를 많이 하고 나를 낮추면 쉬운 것이다.”

CIO포럼 명예회장(명지대 교수) ktlee77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