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필호의 실크로드 속으로] (7) 실크로드의 주인은 누구인가?

[박필호의 실크로드 속으로] (7) 실크로드의 주인은 누구인가?

실크로드의 소멸과 부활

지난 수천년 동안 실크로드를 종횡으로 누비고 다니던 대상들은 19세기 초 부터 20세기 초 사이에 약 100년간의 시간을 두고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였다. 그 첫번재 원인은 산업혁명 이후 말과 낙타 등 구시대의 운반수단이 자동차나 기차 등 동력을 사용하는 신운반수단의 경쟁력에 밀렸기 때문이었다. 두번째로는 국제정치의 환경이 급격하게 변화하기 시작하면서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이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즉, 19세기에 중앙아시아를 훕수하면서 남진하는 제정 러시아와 인도-페르시아 지역에서 이를 저지하려는 대영제국 간의 대립(일명 The Great Game)이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정정 불안의 요소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20세기 들어서는 제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의 공산혁명이 일어나고 중국에서는 청나라의 쇄망과 국공간의 내전 등 정치적 불안요소가 끊임없이 발생하면서 실크로드를 이용하는 대상들의 수는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부분적으로 또한 간헐적으로 이어져 오던 실크로드 교역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하는 냉전기간 동안에 완전히 단절되었다. 그러나 실크로드 교역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휴식을 가진 후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과거의 실크로드는 사람과 동물이 다니는 길이었지만 현재와 미래의 실크로드는 현대화된 각종 운반수단에 더해 눈으로 보이지 않는 정보통신이 오고가는 실크로드로 바뀌고 있다.

낙타를 몰던 대상의 역할은 서울, 북경, 뉴욕, 런던 같은 먼 곳에서 현대적 정보통신 장비를 통해 물자의 이동을 지휘하는 상사원들이 대신하고 있다. 카라반세라이(caravanserai)에서 현물로 이루어지던 고전적 실크로드 상품시장은 이제 선물시장이나 증권시장에서 가치를 구매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지거나 아마존이나 알리바바와 같은 전자상거래 업체를 통해 대상이라는 중간상인을 거치지 않고 직접 구매를 하는 형식으로 바뀌고 있다. 머지않은 장래에는 무인항공기 드론의 실크로드도 생겨날지도 모른다. 실크로드는 이렇게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중국인의 실크로드

그런 실크로드가 이 시대에 부활되면서 어느 특정국가의 전유물인 것 처럼 비추어지고 있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특정국가란 물론 중국이다. 중국 사람들은 인류 문명의 발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4대 발명품인 종이 제조술, 항해를 위한 나침판, 화약, 대량 인쇄술이 자신들 한테 나온 것을 큰 자랑으로 삼고 있으며 심지어는 이태리의 피자도 자신들의 부침개가 실크로드로 전파된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런 중요한 4대 발명품이 중국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 발명품들은 실크로드를 타고 유럽으로 건너가서 유럽인들이 이들을 실용화 하여 16세기 이후에는 그들이 점차 전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런 발명품들이 중국인들의 자랑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부끄러움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피자도 일부 중국 사람들이 믿는 것 처럼 마르코 폴로(AD 1254-1324)가 중국에서 살다가 이태리로 돌아가서 퍼뜨린 것이 아니라 원래 고대 그리스에 있던 비슷한 음식이 변화하여 마르코 폴로가 출생하기 약 250년 전 부터 현재의 이름과 형태를 가지고 이태리에서 퍼지지 시작한 것이다.

중국인들은 지역에서 많은 인구를 가지고 현재 중국 영토의 동부지역인 기름진 땅에 살면서 오랜 세월 동안 동양의 맹주 노릇을 해 온 탓인지 실크로드 마저도 자신들의 전유물인 것 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서안에서 출발하여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였던 시리아의 다마스커스 까지 이어지는 실크로드 전 구간 6400 킬로 중 절반 가량이 현재의 중국 영토 안에 있다.

실크로드 교역에서도 중국 상인들이 중국 밖으로 물건을 팔러 다닌 것이 아니라 외부 상인들이 중국으로 들어 와 가져온 물건을 팔고 중국 물건을 사서 중국 영토 밖으로 여행을 하였으므로 마치 실크로드가 자기들을 위하여 존재하는 양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런 이유에 더해서 그런 교역로가 중국의 상품을 상징하는 비단길로 이름이 붙여졌으니 모든 것을 아전인수 격으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런 역사적 바탕과 독선적 인식 위에 중국이 근래에 들어 신실크로드(New Silk Road)라는 개념을 세우고 지금껏 앉아서 손님을 맞이하던 태도를 바꾸어 실크로드를 타고 밖으로 진출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워놓고 이를 실행에 옮기고 있는 중이다. 중국은 2013년 9월에 실크로드 경제지대(The Silk Road Economic Belt: SREB)라는 개념을 시진핑 주석이 카자흐스탄을 방문했을 때 처음으로 공표하였다.

그 다음 달에는 인도네시아에서 아세안(ASEAN) 국가들과의 관계 강화를 위해 21세기 해상 실크로드(The 21st Century Maritime Silk Road: MSR)를 통한 협력을 강조한 다음 실크로드 국가들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대한 협력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실행 수단으로 아시아 인프라투자 은행(Asian Infrastructure Investment Bank: AIIB)의 설립을 제안하였다. 이로서 중국은 육상과 해상의 실크로드를 “One Belt, One Road(一帶一路)”라는 개념으로 정리하고 우리나라를 포함한 50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AIIB를 설립하기 위한 헌장 서명식을 지난 6월 29일에 가진 바 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실크로드가 부활하게 된 계기는 중국의 역할과는 전혀 관계 없는 것이었다.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실크로드는 지난 세기의 동서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사실상 완전히 소멸되었던 것인데 동서 냉전이 차츰 완화되어 가던 1980년대 부터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가 인류의 긴 역사 속에서 실크로드가 수행한 역할의 중요성을 새로이 인식하고 문화와 문명의 통로로서의 실크로드를 재조명 해보려는 계획은 세웠다. 이에 따라 유네스코는 1987년 부터 10년간 역사 속에서의 실크로드를 탐사할 계획을 세우고 실크로드 해당 국가들은 물론 전세계의 전문가들을 모아 탐험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그 탐험은 2년이 더 연장되어 1999년에 끝났는데 그동안 관련 전문가들이 많은 갈래의 실크로드를 탐사하면서 자료를 모으고 전문가 회의를 거듭하면서 실크로드가 인류의 역사에 끼친 영향과 업적을 재평가하였다. 실크로드 탐사를 계속하던 중에 유네스코와 관련 국가들은 향후 실크로드를 지속적으로 연구할 전문기관이 필요함을 절실히 인식하고 국제연구소를 실크로드의 가장 요충인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에 세워 놓고 지금껏 꾸준히 다양한 연구활동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중국은 실크로드 탐사 이후 실크로드의 연구나 관련 활동에 특별하게 기여한 바 없이 지금껏 세월만 보내다가 근래에 들어 자신들의 경제규모가 커지자 미국과 유럽 중심의 국제정치 및 국제경제 질서에 돌연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고전적 실크로드라는 개념을 확대해석하여 신실크로드라고 이름짓고 이를 활용하여 정치 경제 문화적 세력확장에 시동을 걸고 있는 중이다.

중국은 실크로드라는 단어가 던져 주는 오묘한 뉘앙스, 그리고 실크로드 주요 간선 노선의 종점이 중국 서안이라는 점, 지정학적으로 실크로드 관련 국가들 대부분이 미국과 서유럽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고 있는 개발도상국이라는 점 등을 이용하여 그들을 향후의 중국의 영향력 아래 둘 계획을 세우고 전세계 사람들을 상대로는 실크로드가 마치 중국의 고유 브랜드인 것 처럼 여기도록 교묘하게 착시현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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