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동의 사이버세상]<4>사이버 팍스 아메리카나

[손영동의 사이버세상]<4>사이버 팍스 아메리카나

초국가적 사이버공격으로 지구촌이 몸살을 앓고 있다. 이를 논의하는 국제회의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다양한 세력 간 주도권 다툼의 각축장이 되고 있다. 이와는 별개로 중국·러시아·영국·이스라엘 등 세계 각국은 나름대로의 사이버역량을 키우고 있다. 미국의 정보기술우위와 시장독점에 따른 기술종속의 우려 속에서 자체 핵심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경제력은 물론 압도적인 군사·정보·기술력을 갖춘 초강대국 미국은 사이버공간에서도 패권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백악관 홈페이지를 통해 국민의 사이버안보에 대한 의식제고를 요구하면서, 국가기관·시설에 대한 사이버공격을 ‘전쟁행위’로 간주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2012년 ‘대통령령(PPD) 20호’로 알려진 행정명령을 통해 아예 대통령이 선제적 조치를 취할 수 있게 바꿨다. 사이버위협이 점점 고도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소극적인 방어만 할 수 없다는 것이 미국의 판단이다.

지난 2월 오바마 행정부는 외교·안보 구상이 담긴 새로운 국가안보전략(NSS)을 내놓았다. 이 전략에는 와해적·파괴적인 사이버테러 위험이 갈수록 증대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사이버안보를 새로운 국가안보의 키워드로 적시했다. ‘사이버테러 행위자들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라는 경고도 빠지지 않았다. 4월 들어 이를 반영한 행동명령을 발동, 사이버공격을 국가안보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하는 ‘국가비상상황’으로 규정했다. 이 명령에는 사이버공격에 가담한 개인·단체·기업을 직접 제재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국은 중국의 해킹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매년 수백억 달러로 추산하고 있다. 미 국방부는 해킹을 통해 중국이 무기개발 기간을 25년 단축했다고 평가할 정도다. 그동안 미국은 공개적으로 중국의 군 당국이 조직적으로 자국의 정부기관과 주요시설을 해킹해 왔다고 언급했다. 외교적 마찰을 빚을 수도 있는 미국의 이 같은 위험한 발언의 배경에는 중국의 공격을 입증할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 자신감에 있다.

그 핵심은 공격의 진원지를 밝혀내는 식별(attribution) 능력이다. 행여 오탐으로 엉뚱한 진원지를 공격하게 된다면 이는 심각한 군사·외교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사안이다. 소니픽처스 해킹 사건에서 보듯이 미국은 단기간에 진원지를 식별하고 북한 네트워크를 마비시켰다. 미국의 정보기술력과 디지털 감시 능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이 5년 전부터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사이버게놈(cyber genome) 프로젝트가 있다. 이 프로젝트는 사이버공격의 경로와 배후를 추적하기 위해 악성코드·해커·유포지·공격지 등의 특성을 분석하고, 악성코드의 구조·제작자·제작목적 등 다양한 특징을 도출해 프로파일링 한다. 이처럼 혁신적 연구개발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것은 사이버위협 대응과 함께 새롭게 창출되는 기회를 선점하기 위한 것이다.

미국은 그동안 쌓아온 핵심기술과 원천기술로 세계 표준화에 그 영향력을 높이면서 보유기술의 가치를 재창출한다. 국방관련 과학기술을 선도하고, 이 선도기술을 민간기업에 이전해 세계 디지털 시장에서의 지배력을 강화한다. 이미 정보기술력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마이크로소프트·오라클·시스코·인텔·아이비엠·휴렛패커드·구글·애플·페이스북에 이르기까지 글로벌 정보기술기업의 거의 대부분이 미국 기업이라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20년 가까이 일관성 있게 추진되고 있는 미국의 사이버안보정책이다. 1998년 5월 클린턴 대통령은 행정명령으로 주요기반시설에 대한 보호체계를 마련했고, 부시 대통령은 9·11 테러가 일어난 이듬해인 2002년 11월 국토안보법(HSA)과 12월 연방정보보안관리법(FISMA)을 제정하여 국가사이버보안 관리·통제체계를 일원화했다. 2009년 1월 출범한 오바마 행정부는 사이버안보를 정부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백악관을 중심으로 실행계획을 마련하여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지금까지 국경선이 국토의 기준이었다면 사이버세상에선 정보기술력이 곧 국경이다. 세계 각국은 사이버 자주권 확보를 위해 앞다퉈 사이버역량을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경제력·정보력·기술력 등 모든 면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의 디지털 헤게모니는 장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네트워크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공식을 만들어낸 미국은 ‘미국 주도의 평화’를 뜻하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를 사이버공간으로 확장시켜나갈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손영동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초빙교수 viking@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