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8월 10일. 세계적인 육종학자이자 한국 육종학의 선구자 우장춘 박사가 생을 마감했다.
우장춘 박사는 1898년 4월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으며 한국에는 광복 이후 들어왔다. 우장춘의 아버지는 한국 훈련대 대대장을 거친 우범선으로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 살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이후 일본으로 망명했지만 우장춘 박사가 여섯 살 때인 1903년에 살해당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가난한 가정형편으로 인해 사찰과 고아원을 전전하기도 했다.
1916년에 동경제국대 농학실과에 입학하고 졸업 후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에 취직했다. 이때부터 육종학 연구를 시작했고 1930년에 겹꽃 페튜니아 꽃 육종합성에 성공했다. 세계 최초로 자연종을 합성해 새로운 종을 만들어내는 종의 합성설로 1936년 동경제국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한 그의 박사논문 ‘종의 합성’은 일본을 넘어 해외에서도 주목받는 계기가 됐다.
광복 후 우리나라는 농업 육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고 이 과정에서 1947년 우장춘 환국추진운동이 시작됐다. 당시 정부는 1949년 한국농업과학연구소를 설립하고 연구소장을 맡아달라고 우장춘 박사를 초청한다. 결국 그는 1950년 연구소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국내에 들어온 우 박사는 종자 연구를 통해 한국에 맞는 무와 배추 새 품종을 개발했다. 하지만 국내 종자를 믿지 못해 농민들은 여전히 수입 종자를 원했다. 이를 뒤집기 위한 이벤트가 ‘씨 없는 수박’이었다. 우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는 일본인이 먼저 개발했다. 우 박사가 국내에서 처음 씨 없는 수박을 시범재배해 시식회까지 하면서 개발자로 알려졌을 뿐이다. 그가 씨 없는 수박을 재배한 이유는 국내 종자를 믿지 못하는 시각을 걷어내기 위해서였다. 예상은 적중했고 새로 개발한 종자들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우 박사가 사망할 때까지 국내에 있던 기간이 불과 9년 정도지만, 농업과 육종학 발전에 미친 영향은 상당했다. 이런 성과로 인해 우 박사는 지난 2003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권건호기자 wingh1@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