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3대’라는 말이 있다. 어느 집안의 걸출한 인물로 인해 부가 축적됐다 해도 이 부가 3대를 넘기지 못한다는 우리의 속담이다.
2년 전, 프랑스의 인세아드 경영대학원을 방문했을 때, 그곳 교수들이 한국 기업 경쟁력에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것을 보고 내심 놀란 적이 있었다. 국제시장에서 급격히 떠오르는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의 경쟁력이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이들의 기업문화와 경영시스템 장점은 무엇인가. 여러 교수의 질문을 받았고, 몇몇 박사과정 학생의 연구제목이었다. 학계가 이렇게 우리 기업의 도약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마침 2007년에 시작한 세계경제 위기가 극복되는 과정에서 신흥국가들이 선진 경제권보다 빠르게 성장했고 그 중에 특히 삼성전자의 약진이 일본 소니의 몰락에 대조적으로 돋보였다는 데 연유가 있을 것이다.
그들의 가설은 혁신 원동력을 기업문화나 경영시스템에서 찾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사주경영체제의 신속한 의사결정과 장기적인 경영전략을 가능케 하는 지속 가능한 재벌지배구조에 있다고 설명한 것으로 기억한다. 거기에 하나 더한다면 전문경영인에 비해 사주로서 높은 헌신성이다. 많은 결점과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재벌의 이러한 특성이 이제까지 우리 경제의 압축성장에 긍정적으로 기여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 시스템은 경영환경이 급변할 때 특히 그 효력을 발휘했다.
나라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이룬 성공이란 것을 감안하더라도 창업 1세들은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보았고 엄두도 못 내던 것에 도전했다. 시련을 만났어도 포기할 줄을 몰랐던 이들이다. 누가 뭐래도 산업개발시대의 창업주는 비전의 리더였다. 맨땅을 보며 공장을 구상하고 전후 폐허에서도 세계시장을 꿈꿨고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한 사업에 몸을 던졌다. 그 과정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지만 이들에게는 칠전팔기의 끈기가 있었고 전쟁의 상흔 위에 꿈을 그리는 상상력이 있었다.
창업주 CEO의 혜안과 결단으로 고속 성장한 기업이 바야흐로 창업 2세를 거쳐 창업 3세로 그 경영권이 넘어 가면서 과연 그 신화가 계속될지 관심사다. 국가 총생산의 30%의 비중을 차지하는 삼성그룹의 3세 경영승계가 창업자가 심어놓은 경쟁력과 DNA를 제대로 이어 받을 수 있을까. 이제는 삼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 전체 문제가 돼 버렸다.
창업 2세의 경영과 3세의 경영은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창업 2세는 1세의 기업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각고의 노력을 직접 보고 배웠다. 많은 경우 함께 기업경영에 참여해 그 비전과 가치관 그리고 리더십을 직접 보고 배울 기회가 있었다. 창업주 2대까지만 해도 창업주와 동시대를 살며 동고동락했다.
창업 3세는 다르다. 창업주와 직접 부딪히며 그의 비전과 의중을 일대일로 접할 기회가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사업에 관한 한 선대 창업자의 기억도 희미해졌을 것이다.
시장경제에서는 자본의 힘이 이기게 돼 있고 도전과 영혼이 없는 기업경영은 ‘좀비 경영’으로 퇴화되게 마련이다. 뚜렷한 비전이나 창의적인 도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불투명하게 상속 받은 자본력에만 의존해서 규모의 경제와 유통의 효율화를 부르짖으며 빵집, 분식집, 편의점 등 서민 몫의 골목상권을 접수하고 하도급업체를 쥐어짜는 데 몰두하게 된다.
창업자의 성공이 3대를 못 넘긴 사례로 성경의 유대왕국이 있다. 아글람동굴에서 보잘것없는 400여명의 추종자들을 기반으로 일어선 다윗의 나라는 그 아들 솔로몬에 이르러 절정에 다다른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광야에서 겪은 연단과는 거리가 멀게 상류층 자손들에게 둘러싸여 성장한 3대 르호보암에 가서는 민심이 이반하고 나라가 갈라지는 등 급속한 몰락의 길을 걷는다.
그런가 하면 몇 대에 걸쳐 성공적으로 부와 기업을 세습해 오는 가문도 있다 스웨덴의 전설적인 발런버리가의 후손들은 아직도 나라 총생산의 30%에 해당하는 부를 소유하면서도 주위의 존경을 받고 있다.
산업 근대화의 주역인 재벌들의 3세대 경영이 과연 어느 사례를 따를지 국민은 우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북한의 김정은 정권도 이 3세대 증후군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이용경 전 국회의원 yongkyung.lee@insead.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