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한국은 세계 반도체 생산 16.5%를 차지하여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를 기록했다. 수출도 단일 품목 사상 최초로 600억달러를 돌파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첨단 기술력과 막대한 자본이 요구되는 반도체 산업에서 한국이 이룬 이러한 성과는 국가적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하다.
국내 반도체 대기업이 주도한 이러한 성공의 이면을 살펴보자. 최첨단 반도체를 제조하기 위해서는 고난도 공정을 수행할 첨단 장비가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반도체 생산 대국답게 반도체를 제조하는 장비 구매도 세계시장 21%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장비는 해외업체에서 수입하고 국내업체가 생산하는 장비는 고작 세계시장 점유율 3% 남짓에 그친다.
최첨단 노광장비는 한 대당 1000억원을 웃도는 실정이다. 일정 규모 생산량을 갖춘 한 라인을 건설하는 데 노광장비 수십대가 필요하다. 전량 수입에 의존한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2014년 한 해에만 반도체 제조 장비 수입금액이 무려 9조원이 넘는다. 반도체 수출로 벌어들인 막대한 외화가 다시 해외로 빠져나가는 심각한 무역역조 원인이 되고 있다. 반도체 생산 선진국이 반도체 장비 산업에서는 후진국인 셈이다.
이에 비해 미국, 일본, 유럽은 그 기술력을 바탕으로 반도체 장비 시장을 대략 3등분하며 반도체 제품 산업과 함께 균형 성장을 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기형적 반도체 산업 구조가 가져오는 폐해는 단순히 반도체 장비 산업에서의 무역수지 불균형에 그치지 않는다.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공정 기술이 장비에 의존하는 경향이 심화됨으로써 첨단 반도체 개발 주도권이 장비회사로 넘어가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반도체 장비회사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소자기업에 장비를 납품하고 소자기업은 그 장비를 이용해 필요한 제품을 만드는 공정기술을 개발해 왔다. 최근 반도체 소자 미세화가 심화되며 첨단 장비 없이는 필요한 공정을 개발할 수 없게 됐다.
공정기술 자체도 장비회사가 미리 개발해 장비에 탑재하고 공급하는 턴키방식도 많아지고 있다. 심지어 공정을 모듈화해 일련의 공정을 한 장비에서 모두 진행할 수 있는 장비도 공급되고 있다.
소자회사가 해야 할 일들이 장비회사로 이전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반도체 산업에서 발생하는 부가가치가 소자회사에서 장비회사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반도체 장비는 반도체 제조 원가 경쟁력의 핵심적 요인이다. 반도체 장비는 반도체 제조 생산성에 직접적으로 40% 이상 영향을 미치고 수율향상, 집적도 증대 등 여타 생산성 향상 요인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준다. 이러한 경향은 반도체 제조 기술의 첨단화에 따라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1980년대 초반 애플과 IBM에 의해 발명되고 보급된 PC는 개인에 의한 컴퓨터 사용이라는 혁명을 일으켰고 인류사회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다. 당시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하이테크였던 PC는 부품 모듈화와 규격화에 따라 지금은 중학생도 조립할 수 있는 로테크 산업이 됐다.
PC 산업 부가가치는 부품 산업으로 전이됐고 핵심부품인 반도체가 수혜를 받아왔다.
현재 스마트폰 사업도 그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반도체 또한 장비에 의한 공정 모듈화로 PC와 스마트폰 산업처럼 사양 길에 들어설 수 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막대한 자본만 있다면 최첨단 제조 장비를 사들여 순서대로 버튼만 누르면 반도체를 제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장인은 연장 탓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최고 기술을 가진 목수는 톱과 망치만 있으면 만들지 못할 것이 없었다. 지금은 최첨단 연장이 장인 기술을 대체하는 시대다. 해외 글로벌 장비 업체는 합종연횡하며 경쟁력을 키워가고 있고 시장 독점력을 바탕으로 장비 구매 단가를 지속적으로 올려 수익을 극대화하고 있다.
반면에 국내 반도체 장비 업체는 대부분 규모가 영세해 첨단 장비 개발에 투자할 여력이 부족하다. 국내 장비 산업 고사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수익성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대체 장비 구매처가 없어 해외 독점 업체와 장비 가격 협상에서 주도권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정부는 그간 반도체 산업에서 우리나라가 이룬 성취감에 젖어 반도체 분야에 더 이상의 연구개발 투자를 자제하고 있다. 그리고는 반도체 분야를 이을 수 있는 차세대 먹거리를 찾고 있다.
과연 우리는 지속 가능한 반도체 산업 경쟁력을 갖고 있는지 깊이 고민해 봐야 할 때다. 반도체 장인(匠人)은 연장을 탓하지 않는가.
양지운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 반도체공정·장비 PD jyang@keit.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