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도 소기업도 아닌 중견기업체를 운영하다 보면 동화 속 ‘박쥐’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소기업에만 주어지는 각종 지원 및 혜택을 더는 받기가 어렵고 그렇다고 대기업으로 치고 나가자니 진입장벽이 높은 까닭이다.
대한민국 경제 주축이 돼왔던 중소·중견 기업이 성장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서 대기업과 협력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지원이 장려돼야 한다는 목소리는 어제오늘 나온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1980년대부터 30여년간 몸담아 온 해양플랜트 산업은 세계 에너지 수급에 영향을 받는 산업으로 전후방 사업 연관 효과가 커 시장 가능성이 크다. 특히 해양플랜트 사업 핵심부품으로 손꼽히고 있는 해양플랜트 밸브는 조선산업에 이어 한국이 주도할 수 있는 새로운 먹거리로 각광받고 있다.
그러나 중소기업에 해양플랜트 밸브 산업 진입장벽은 매우 높다. 까다로운 인증을 거쳐 안정성을 검증받는 등 개발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다. 개발에 성공한다고 해도 현장 선주 지정을 받아야 적용될 수 있다. 그럼에도 많은 중견기업은 진입에 성공했다. 이 실적을 기초로 다른 선박 선주에게도 납품을 할 수 있는 물꼬를 트게 됐다.
중견기업이 시장의 높은 진입 장벽을 돌파하고 도약할 수 있었던 열쇠는 어디에 있을까. 그 답은 바로 대·중·소의 실질적 네트워크 구축과 협력에 있다.
미국 샌디에이고 바이오클러스터는 전문인력과 기업, 연구기관과 공공기관이 네트워크로써 규모의 경제를 이룬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되곤 한다. 이들의 성공은 긴밀한 협력 관계로 이루어진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도 한국산업단지관리공단 ‘산업집적지경쟁력강화사업’으로 이 같은 협력을 하고 있다. 앞서 말한 해양플랜트 밸브 국산화를 이룰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국내 중소기업 중 우수한 밸브 생산업체와 대기업인 조선소, 그리고 지원기관인 산단공이 힘을 합친 덕분이다.
기술력을 가진 중소기업은 해양플랜트 밸브 공급 및 제품 안정성 인증에 적극 협력했다. 조선소는 엔지니어링 단계에서 국산화 적용을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산단공에서는 산업 공통 애로를 파악하고 조선소와 밸브 국산화 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하기 위한 설명회를 개최하는 등 국산화 지원에 총력을 다했다.
결과는 바로 나타났다. 중소기업은 높은 진입장벽을 뚫고 나아갈 수 있는 물꼬를 트게 됐다. 중소기업이 제조한 부품을 대기업 조선소에 납품하고, 대기업은 중소기업 부품으로 모듈을 만들어 해외 선주 선박에 납품했다. 이 실적을 토대로 중소기업은 다른 선주 선박에도 납품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게 됐다.
또 대기업 조선소는 안정될 밸브를 수급할 수 있게 됐다. 해양플랜트 밸브는 수입 의존율이 80%에 달하기 때문에 적절한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를 국산화함으로써 원가를 절감하고, 안정된 밸브를 수급해 건조 시간을 절약했다.
자생력 있는 네트워크도 형성됐다. 해양플랜트 밸브 국산화 이후, 산업 간 교류와 협력의 중요성을 깨달은 업체들이 자율적으로 조합을 만들어 네트워크를 이어가게 됐다.
침체된 내수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대·중·소 상생에 주목하는 분위기는 반갑다. 하지만 이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네트워크가 지속되는 데 한계가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겪고 있는 실질적인 문제를 발견하고 상생할 수 있도록 적절히 매칭하기 위해서는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지원 기관 역할이 중요하다.
지원 기관의 지혜롭고 실질적인 역할로 대중소 공조를 통한 내수 시장 활성화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박윤소 엔케이 회장(한국조선해양기자재연구원 이사장) yspark@nkcf.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