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물 등 임상실험에 사용되는 쥐. 일반적으로 쥐 임상실험은 수컷 쥐로 진행한다. 암컷 쥐는 생리작용 등 고려해야 할 요소가 수컷보다 많아 실험 비용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컷 쥐와 암컷 쥐로 동일한 실험을 했을 때 결과가 다르게 나오는 사례가 속속 발견됐다. 이 때문에 미국 국립보건원은 지난해부터 쥐를 이용한 동물실험을 할 때 쥐 성별을 맞추는 규정을 추가했다.
#자동차 충돌실험에 사용하는 실물형 인체모형 ‘더미’는 남성의 신체 데이터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가장 흔한 교통사고 상해인 목뼈 부상은 남성보다 여성이 두 배 더 높은 위험도를 갖고 있다. 남성 데이터 기반 더미 실험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과학기술은 객관적인 분석과 실험을 거쳐 결과를 도출한다. 하지만 수십년간 남녀 구분, 즉 젠더가 제대로 고려되지 않았다. 젠더를 고려하지 않은 분석과 실험으로 오류가 발생한 일도 많았다.
과학계에서는 젠더 다양성에 기초한 과학기술 생태계를 조성해야 사회적 진보에 기여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 플라자호텔에서는 오는 26일부터 28일까지 사흘간 열리는 ‘2015 아태 젠더서밋’에서 과학기술 분야 젠더 혁신을 논의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젠더 혁신이 연구 수월성 높여=성(sex)은 생물학적으로 남녀를 구분하는 신체적·유전학적 용어인 반면에 젠더(gender)는 생물학적 속성 외에 사회적인 환경과 훈련에 의해 남녀 기질이 형성된다는 것을 강조한 용어다.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기초, 응용, 사업화 개발에 이르는 연구개발 전 단계에 젠더 분석을 도입해 편견과 편향을 제거해야 한다. 과학기술은 객관적·보편적 지식을 도출하는 것이 목표인데 젠더분석이 이뤄지지 않으면 과학적 우수성을 저해하고 사회적 비용도 초래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최근 캐나다 연구진이 발표한 실험결과를 보면 암컷 쥐와 수컷 쥐에서 만성통증이 나타나는 신경 경로가 다르게 나타났다. 같은 통증 억제 약물을 주입했을 때 수컷에서는 작용했지만 암컷에서는 다른 경로로 우회하며 통증 억제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흔히 여성형 질환으로 알려진 골다공증도 잘못 알려진 인식이 상당 기간 지속된 경우다. 일반적으로 폐경기 여성에게 발병 위험도가 높다고 알려졌지만 미국과 유럽 골다공증성 골반 골절 환자 3분의 1이 남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골절로 인한 결과는 여성보다 남성에게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여성 질병이라는 편견 때문에 1997년에 남성 표본이 마련되기 전까지 골다공증 골밀도 판단 기준은 여성을 표준으로 했다.
이 때문에 과학계는 남녀 모두를 위한 연구 혁신을 위해 과학기술 분야에서 젠더혁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과학기술 선진국은 젠더혁신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인다.
미국은 2001년 국가과학재단(NSF)을 통해 과학연구에서 젠더 편견을 없애기 위한 체계적인 펀딩인 ‘NSF 어드밴스 프로그램(NSF Advance Program)’을 시작했다. 2010년엔 심장학 관련 저널들이 투고지침을 개정해 역학 및 임상연구결과 보고 시 젠더 영향 보고를 의무화했다.
유럽연합(EU)도 2001년부터 다양한 젠더 혁신 방안을 시행해왔다. 연구비 지원 시 젠더 이슈 고려를 의무화하고 중장기 과학기술계획에 여성 역할 증대를 위한 연구윤리원칙 개정 등을 추진했다. 또 약물 임상시험에서 젠더 고려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도 했다.
국제연합(UN)도 2011년에 과학과 공학 연구개발 및 교육에서 젠더 영향평가 실시를 촉구한 바 있다.
◇아태 젠더서밋, 국내 젠더 논의 시발점=선진국과 달리 우리나라 젠더 혁신 논의는 아직 초기 단계다. 지난해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에서 수행한 ‘과학과 엔지니어링에서의 젠더를 반영한 연구개발 혁신방안 연구’를 통해 과학기술 젠더혁신 개념이 도입됐고 같은 해 6월 ‘젠더혁신포럼’이 창립하며 공론화됐다.
이어 올해 아태 젠더서밋이 국내에서 열리면서 젠더혁신 논의가 촉발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젠더서밋은 젠더 결함이 없는 연구개발을 통한 과학기술혁신 및 새로운 부가가치 창출을 목적으로 2011년부터 유럽연합(EU)을 중심으로 매년 열리는 행사다. 2013년 북미지역, 올해 아프리카와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확대됐다.
젠더서밋은 유럽에서 처음 열렸지만 유럽과 미국은 물론이고 아시아 아프리카 등 모든 지역에서 큰 지지를 받고 있다. 젠더 이슈를 올바른 방향으로 풀어나갈 때 국가 발전에도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젠더가 여성학 측면에서 시작했지만 젠더서밋은 과학기술 분야에서 젠더 이슈를 다루기 때문에 목표와 방향이 분명하다. EU, 미국 등 각국 정부도 이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이번 서밋에서는 제랄딘 리치몬드 미국 과학진흥협회(AAAS) 회장의 기조연설을 시작으로 5개 분야별 세션과 콘퍼런스, 워크숍 등이 열린다.
주요 발표 내용을 보면 제프리 모길 캐나다 맥길대 의대 교수가 암수 쥐 실험에서 척수 통증과 만성 통증을 치료하는 과정이 남녀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의 새로운 데이터를 소개하고 헬레나 왕 더 란셋 코리아 편집장이 의학전문학술지 ‘란셋’에 어떻게 젠더적 접근이 실현되는지 발표한다. 엘리자베스 폴리처 영국 포샤 소장은 암과 관련한 방사선 사고가 여성이 남성보다 많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의료 방사선 표준이 남성 신체를 기준으로 하고 있어 여성이 방사선에 더 많이 노출될 수 있다는 내용을 발표한다.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는 “과학기술분야에서 젠더 이슈는 인류의 보건과 건강을 향상시키고 불필요한 복지 및 치료비용을 줄여줘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면서 “또 여성의 연구개발 능력을 향상시켜 효율적인 연구 성과를 거둘 때 문화발전은 물론이고 경제발전에도 공헌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권건호기자 wingh1@etnews.com
-
권건호 기자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