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와 디스플레이는 우리나라 핵심 수출품목이지만 중국에서도 역시 상위 수출품목을 차지하는 주요 고부가가치 산업이다. 저렴한 인건비와 원재료 비용 경쟁력을 바탕으로 세계 공장으로 성장했지만 이제 중국 성장 전략은 예전과 다르다. 고부가가치 산업을 집중 육성해 산업 구조를 고도화하고 수입에 의존해온 첨단 제품을 국산화해 내수 시장을 확대하는 데 팔을 걷었다.
중국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산업 주도권을 쥐려는 몸부림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다. 우리나라는 대기업 위주로 세계 최고 수준 반도체·디스플레이 첨단 기술을 보유했다. 하지만 허약한 후방산업 경쟁력과 국가 차원의 지원 의지 상실, 폐쇄적 생태계 분위기가 계속 이어진다면 중국에 추격당하는 건 시간 문제다. 건강한 산업 성장을 담보하기 위한 대응책 마련이 절실하다.
◇인재 키우고 산업 육성 정책·문화 뒷받침돼야
중국은 빠른 속도로 전 세계 크고 작은 반도체 기업과 기술을 흡수하고 있다. D램 전문 인력을 영입하기 위해 거액을 제시하는 등 인력 투자도 적극적이다. 세계에서 모여든 전문 인력과 기술을 합쳐 반도체 국산화 비율을 높이겠다는 강력한 정부 의지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
최근 국내에서 벌어지는 중국발 반도체 인력유출은 향후 한국 반도체 산업 경쟁력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3배 이상 높은 연봉을 제시하고 다양한 도전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점에서 솔깃한 제안일 수밖에 없다.
업계는 고급 반도체 인력을 더 많이 양성하고 창업을 활성화해 전문 인력이 시장에서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시장 환경을 조성하는 게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세계 D램 1·2위를 거머쥐었지만 이에 비해 대학에서 반도체를 전공한 석·박사 인력은 턱없이 적은 게 현실이다. 반도체 설계·장비·재료 등 열악한 후방산업과 대형 종합반도체(IDM) 기업 간 격차가 큰데 정작 정부는 ‘반도체=대기업 사업’으로 인식하고 지원 사업을 줄이면서 자연스럽게 대학 연구실도 설 자리를 잃었기 때문이다.
한 대학 교수는 “여러 반도체 부문 중 재료 전공자가 가장 많지만 정작 한국의 반도체 재료 산업 경쟁력은 일본과 미국에 비해 한참 뒤떨어져 있다”며 “정부는 물론이고 대기업도 대학과 공동연구를 줄이고 단기성과에 치중한 내부 프로젝트만 하다 보니 대학 연구실 역할이 없어져 바이오 등 자금이 몰리는 인기 분야로 영역을 옮기는 사례가 많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교수는 “전문 인력을 대학에서 배출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산업의 미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왜 대학에서 반도체 전공자가 줄어드는지, 교수가 다른 연구로 빠져나가는지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한국 반도체 미래는 없다”고 강조했다.
업계는 메모리에 치우친 구조를 시스템반도체 등 다양한 반도체 산업 분야로 넓히고 각 분야 전문가를 지속적으로 양성해 이들이 오랫동안 산업에 기여할 수 있는 기반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허기술 개발에 기여한 엔지니어에게 지식재산권을 인정해주는 등 ‘명장’을 키우고 존중하는 기업 차원 전략적 투자도 필요하다.
◇카피캣 대응·모방 힘든 IP 확보가 해법
카피캣 대응도 절실하다. 반도체 장비는 어플라이드머티리얼스, 램리서치, ASML 등 매출 1조원 규모 세계적 장비 기업에 비해 국내 장비사는 후발주자다. 특허기술을 피해 선진 제품을 모방하는 사례가 많은 만큼 특정 공정 영역에서 국내 기업과 카피캣 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향후 중국이 전략적으로 국내 기업 상대로 제품 모방 문제를 제기하는 역공을 펼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에 중소 후방기업을 위한 특허 지원과 교육이 필요하다.
업계는 어렵지만 가장 확실하게 기술 경쟁력을 갖추는 방안이 ‘피해가기 힘든 지식재산(IP)’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칩 설계와 장비 제조 등 각 분야에 걸쳐 선진 제품을 전략적으로 모방하더라도 피해가기 힘든 특허기술이 중심에 있다면 모방도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반도체 원천기술이 적은 국내 산업 특성상 카피캣 위험에 더 노출돼 있다.
한 반도체설계(팹리스) 기업 대표는 “중국이 반도체 산업 육성에 나서면서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것은 시스템반도체 분야 중소 팹리스 기업”이라며 “자금, 정보, 인력 등 모든 면에서 힘겨운 경쟁을 벌여야 하는 만큼 새로운 형태의 정부 지원과 생태계 조성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른 관계자는 “중국은 반도체 장비·소재 등 전 생태계를 국산화하겠다는 분명한 계획을 실천하고 있다”며 “반도체가 국가 기간산업인 만큼 중소기업이 대다수인 후방산업 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국가 차원의 전반적인 전략 점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세트 업체와 협업으로 새로운 시장 창출해야
중국 디스플레이 산업이 단기간에 우리나라 턱밑까지 추격할 수 있었던 데는 정부의 ‘묻지마’ 투자가 주효했다. 투자 배경에는 중국 휴대폰·TV 등 전방 세트산업 급성장이 자리 잡고 있다. 국내 디스플레이 산업이 일본을 꺾고 세계 강국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배경과 비슷하다.
디스플레이 강국이었던 일본은 세트 업체 몰락으로 현재 샤프와 JDI 2개 업체만 남은 상황이다. 소니, 도시바 등 업체들이 디스플레이 사업에서 연일 적자를 기록하자 일본 정부가 JDI를 신설해 합병시켰다. 세트 기업 경쟁력 약화가 소재부품 산업에 직격타를 날렸다.
중국은 일본과 우리나라로 대표되던 ‘전자 왕국’ 자리를 노리고 있다. 샤오미는 스마트폰으로 모바일 기기 컨버전스를 주도한 애플을 위협하고 있다. 화웨이, ZTE, 레노버 등 중국 로컬 휴대전화 업계 공세도 만만치 않다. 중국에서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던 애플과 삼성전자를 조금씩 밀어내고 있다. 더 이상 짝퉁 제품을 만드는 업체들이 아니다. 프리미엄 제품 영역으로 세 확장을 하고 있고 혁신적인 제품 출시에도 적극적이다. 스마트폰뿐 아니라 TV 등 가전 시장에서도 중국 업체들이 주도권 확보에 애쓰고 있다.
업계 전문가는 “중국은 세트 업체 급성장으로 소재부품 업체 매출 구조 등이 탄탄하게 동반성장하고 있다”며 “국내도 삼성전자, LG전자 등이 새로운 먹거리를 만드는 혁신적인 시장을 열어줘야 반도체, 디스플레이와 같은 후방산업 생태계가 더욱 굳건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한국 전자산업과 디스플레이 산업이 모두 재도약하기 위해서는 누구도 따라하기 힘든 차별화된 혁신 제품이 필요하다”며 “앞서 일본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미래 시장을 이끌 수 있는 혁신 제품 생산과 초격차 기술 확보에 세트·소재부품업체 간 유기적 공조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성현희기자 sunghh@etnews.com, 배옥진기자 witho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