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선의 '프로이트 레시피'] 엄마는 밥이다

(2) 단맛: 기억과 추억

[고재선의 '프로이트 레시피'] 엄마는 밥이다

엄마의 시집살이는 맵고 매운 고추보다 더 혹독했다. 대가족의 맏며느리인 엄마가 매일 사들이는 식료품은 상상을 초월했다. 쌀은 가마니로, 반찬거리는궤짝으로 들어왔다. 세끼 식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봄에는 달달한 단팥으로 속을 채운 달덩이 같은 찐빵을, 여름에는 애호박채가 연둣빛을 머금은 싱그러운 밀전병을, 겨울에는 적당히 신 김치가 아삭하게 씹히는 김치만두를 만들어 내놓았다.

호떡은 계절을 넘나드는 전천후 간식으로 우리 집 안방 아랫목은 늘 이스트를 넣어 한껏 부풀어 있는 밀가루 반죽이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생선도 철마다 궤짝으로 사들였다. 정월 명태로는 북어나 황태를 만들었고 명태 알은 명란젓을, 창자는 소금과 고춧가루를 넣고 버무려 창난젓을 만들었다. 가자미는 꾸덕꾸덕 말려서 항아리에 넣어 두었다가 겨울 내내 상에 올렸다. 5월의 꽃게는 입맛 없는 여름철 밥도둑 게장이 되었고, 김장철의 꽁치, 고등어, 도루묵은 마당에 숯불을 피워 구워 먹는 별미였다.

우리 집은 마당이 있는 한옥이었다. 쪽문으로 이어진 부엌 뒷마당에는 우물과 장독대가 있었다. 장독대에는 간장, 고추장, 말린 생선이나 나물이 담긴 항아리들이 줄지어 있었다. 장독대 밑의 지하실은 지금으로 치면 냉장고이자 냉동고였다. 햇볕이 들지 않는 서늘한 공간에 엄마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김치며 장아찌를 담은항아리들과 과일 상자들이 가득 들어찼다. 그곳 항아리들은 깊은 숨을 내쉬며 자신들의 역할을 다했다.

항아리 속의 먹을 것들은 습기를 피해 변질되지 않았고 김치와 장아찌는 곰삭아 깊은 맛을 냈다. 그것들이 우리 가족의 먹거리를 공급했고, 엄마는 항아리들을 진두지휘하는 대장이었다. 엄마를 생각하면 항상 줄지어 있는 장독과 그 안을 채운 온갖 먹을 것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지금 내가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힘과 에너지를 주는 존재로서 말이다.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필자소개/고재선

그래픽 디자이너로 국내외에서 활동해 왔으며 식문화에 대한 이론과 실제에 밝다. 음식을 맛 이전에 다양한 시각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파악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글과 시각적 요소의 통합을 위해 직접 이 책의 북 디자인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