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시작해 세계를 뒤흔든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지 수년이 흘렀다. 그 후유증은 여전하다. 경제·산업 각 분야 금융위기 상흔은 지워지지 않았다.
특히 은행권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고 있다. 많은 은행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수준 성장세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20% 이상 추락한 자기자본이익률(ReturnonEquity·RoE)을 다시 끌어올리지 못한 채 허덕이고 있다.
앞으로의 경기 전망도 밝지 않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늪에서 계속 벗어나지 못한 채 끝없이 암울한 터널을 지나야할 수도 있다.
급격한 정보통신기술(ICT) 발달과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고객들의 취향까지 감안한다면 오프라인 지점을 통해 고객을 만나고 영업서비스를 해 온 기존 은행들은 하루빨리 근본적인 개혁작업에 돌입해야 한다. 핀테크 시대가 도래했다. 핀테크 비즈니스를 성공적으로 안착하기 위해선 모든 참여자들이 상생할 수 있는 전문 이노베이션 랩을 만들자는 목소리가 높다.<편집자>
◇세계는 지금 핀테크 열풍…IT와 금융 융합 ‘빅뱅’
지점을 두고 영업하는 전통적인 은행영업은 2020년까지 기존보다 35% 넘게 줄어들 전망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 시장을 차지할까. 기존 은행보다 더 민첩하고 유연하면서도 혁신적인 디지털 기술로 무장한 IT기업이 그 주인공이다.
기존 은행도 절망할 필요는 없다. 적절한 디지털 기술을 지금부터 도입해 효과적으로 미래에 대비한다면 안정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
금융시장에 IT가 접목되면서 ‘핀테크(Fintech)’가 주목받고 있다. 핀테크는 파이낸셜(financial)과 기술(technique)의 합성어로 모바일 결제, 송금, 개인자산관리, 크라우드펀딩 등 금융 서비스와 관련된 기술을 의미한다.
최근 한국도 간편결제 바람이 불면서 IT로 중무장한 글로벌 핀테크 기업들이 진출하고 있다.
핀테크는 엄밀히 말하면 통신이나 대금지불(payments) 사업자 등과 연계한 융합사업(convergence)에서 출발한다. 전통 금융시장에 기존 채널이 아닌 IT를 바탕으로 새로운 사업 분야가 생겨나고 여기서 새로운 경쟁자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디지털 기술 발달로 은행과 고객의 양방향, 실시간 소통이 가능해지면서 핀테크 영역 확장은 시간문제다.
구글은 송금 의뢰자와 수탁자를 직접 연결시키기 위해 ‘인터넷 플랫폼’을 구축했다. 은행 뱅킹 시스템과 경쟁하기 위해서다. 이를 통해 송금수수료와 시간을 크게 줄였다. 아마존은 은행계좌와 신용카드에 IT를 접목한 새로운 결제 방식을 선보였다. 간편 지급결제 서비스다. 중국 알리바바는 온라인으로 자산관리를 시작했고 최근 은행인가를 받았다.
핀테크가 금융시장의 파괴로 불리는 이유는 금융사가 아닌 IT기업이 금융업에 진출하고 자금과 담보가 아닌 IT를 전면에 내세워 기존 금융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엎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금융시장이 새로운 먹거리를 창출하고 생존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건 핀테크로 불리는 새로운 기술 융합, 혹은 기술 우위의 핀테크 기업을 인수·합병하는 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핀테크 기업을 별도로 분류할 수 있는 기준도 없고 미국·영국 등이 시행하는 정부 차원 양성 프로그램도 전무하다.
◇금융기관+기업 융합할 새로운 ‘핀테크 랩’ 절실
아태지역 핀테크 벤처 투자액은 2013년 2억4500만달러에서 2014년 7억6700만달러로 세 배 이상 증가했다. 투자 건수 또한 2010년 10건에서 지난해 103건으로 10배가량 늘어났다.
이처럼 핀테크 분야에 대한 투자 증가는 디지털 혁명이 금융 서비스 분야에서 제대로 자리잡고 있으며, 은행권에 위협이자 기회임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핀테크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새로운 경쟁자와 스타트업 기업의 은행산업 진입을 가속화하는 동시에 은행 스스로 혁신을 시도하고 스타트업 기업과 협력을 통해 고객을 위한 새로운 상품과 솔루션 개발에 나서도록 한다는 것이다.
핀테크 랩을 주축으로 세계 핀테크 융합 빅뱅은 시작됐다.
지난 5월 세계 유수 금융기관 10곳이 ‘핀테크 이노베이션 랩 아시아퍼시픽(FinTech Innovation Lab Asia-Pacific)’ 프로그램 참가신청 접수를 마쳤다.
아시아 지역 금융기술 혁신을 이끄는 우수 기업을 찾기 위한 핀테크 행사로 창업 초기 또는 성장 단계에 있는 금융기술 혁신기업의 제품 개발을 촉진하고 금융업계 최고경영진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홍콩에서 개최되며 12주간 진행된다.
대안 화폐(alternative currencies), 빅데이터 및 분석, 모바일 및 무선결제, 위험관리 및 컴플라이언스는 물론이고 소셜미디어와 콜라보레이션 기술 등 금융 서비스 분야의 판도를 뒤바꿀 수 있는 잠재력 있는 기술을 개발 중인 기업이 참가 대상이다. BoA 메릴린치, 중국건설은행(아시아), 중신은행 인터내셔널, 호주 커먼웰스은행, 크레디트 스위스, HSBC, JP모건, 메이뱅크, 모건 스탠리 및 UBS 등 선도적인 금융기관 중역급 인사들이 직접 참가기업을 엄선해 홍콩에서 집중적인 일대일 멘토링 교육을 제공할 예정이다.
핀테크 이노베이션 랩 아시아퍼시픽은 액센츄어와 뉴욕시 파트너십 펀드(Partnership Fund for New York City)가 2010년 공동 창설했던 프로그램을 모델로 삼아 기획된 것으로 뉴욕시 파트너십 펀드는 뉴욕시 파트너십의 1억1000만달러 규모 투자기금이다. 해당 프로그램 출신의 24개 기업은 프로그램 참가 후 총 1억6000만달러를 상회하는 벤처 투자금 유치에 성공했다. 한 참가기업은 1억7500만달러에 인수됐다.
런던시도 주요 정부기관 지원 속에 런던에 위치한 십여개 주요 은행과 함께 2012년 핀테크 이노베이션 랩 런던을 론칭했다. 론칭 후 2년 간 해당 프로그램을 거친 14개 기업의 신규 투자유치액은 3500만달러를 상회했다. 은행권과의 비즈니스 계약 체결 또한 50여건에 이른 것은 물론이고 매출액도 170%가량 상승했다. 2014년 액센츄어는 핀테크 이노베이션 랩을 아태지역과 아일랜드 더블린에 론칭했다. 아태지역 랩 참가기업의 투자유치액은 600만달러를 넘어섰다.
◇범정부 핀테크 컨트롤타워 만들어야
이 같은 해외 랩 사례를 한국도 적극 도입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정부 지원이 시급하다. 한국은 핀테크를 체계적으로 육성할 컨트롤타워가 없어 눈앞으로 다가온 신(新)금융시대를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차세대 IT 융·복합 금융산업에 대한 정부 및 관련 업계 대응과 인식은 소극적이다. 금융당국은 아직까지 핀테크나 새로운 금융IT 서비스를 육성 대상으로 둘 것인지, 어떻게 진흥할 것인지조차 방향을 잡지 못한 상태다.
차세대 국가 먹거리를 고민하는 미래창조과학부나 산업통상자원부 등 타 부처 역시 ‘금융’은 아예 손을 놓고 있는 상태다.
아이디어로 무장한 벤처기업이나 스타트업도 금융업에 참여하기 쉽지 않은 구조다. 새로운 사업모델은 인허가에만 수 개월에서 1년 이상 기다려야 한다. 이 사이 중소기업들은 사업을 포기하기 쉽다. 금융업은 엄격한 자본관리 규제를 받는다. 아이디어로 IT와 결합한 금융모델을 개발해도 영세한 벤처기업이라면 사업을 펼치기 쉽지 않다.
최근 금융권이 공동 핀테크 오픈플랫폼 구축에 나섰지만 이 또한 시간이 걸린다.
해외에서는 IT와 결합한 금융 신사업이 폭발적으로 확산 중이다. 글로벌 IT기업의 금융업 진출은 이미 큰 흐름이다. 구글이 2011년 모바일 전자지갑 서비스 ‘구글 월렛’을 출시한 데 이어 지난해 이메일 기반 송금 서비스를 추가했다. 애플은 최근 근거리무선통신(NFC)을 지원하는 전자결제 서비스 ‘애플 페이’를 확대하고 있다. 아마존도 지난 6월 전자결제 서비스인 ‘아마존 페이먼트’를 선보였다. 중국의 대표 IT기업 알리바바와 텐센트, 바이두 모두 지급결제는 물론이고 온라인 머니마켓펀드(MMF), 소액대출 등의 금융서비스에 착수했다.
우리 금융업도 이제는 ‘금융+IT 빅뱅’ 새 흐름을 타고 도약의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기존 시장질서가 깨지는 격변기는 위기이면서 기회도 제공한다. 다행스럽게도 해외 핀테크 붐도 아직은 초기 단계다.
우선 금융회사와 금융 신기술 스타트업과의 연계와 투자, 금융사와 IT기업 간 업무제휴, 창조적 아이디어의 금융스타트업 육성 등 정부 차원의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 규제 일변도 금융정책을 육성과 사후 규제로 전환해 새로운 시도를 늘려야 한다.
전문가들은 한국형 핀테크 생태계를 구축해 해외에서도 경쟁력을 갖춘 ‘금융형 로밍’ 플랫폼을 만들어가자고 입을 모은다. 각종 규제와 사업자간 온도차로 그동안 한국 핀테크산업은 ‘해야 한다’는 의무감만 시장에 팽배한 것이 현실이다. 무엇을 위해, 그리고 왜 해야 하는지 나침반이 없다.
정부와 금융기관, 스타트업, 벤처캐피털(VC) 등이 유기적으로 조합해 ‘핀테크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 선결과제다. 한국의 IT인프라 활용 능력은 오히려 해외 선진국보다 3년 이상 뒤처져 있다는 냉엄한 분석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현 시점에서 국내 핀테크는 해외 IT 기반 서비스를 쫓아가는 환경이 됐다는 이야기다.
핀테크를 막연히 ‘해야 한다’는 논리에 갇혀 있어선 안 된다. 무엇을 위한 핀테크인지, 한국이 원하는 핀테크가 어떤 것인지 면밀하게 머리를 맞대고 접점을 찾아야 한다.
이미 해외에서는 IT를 이종산업 분야에 접목시키려는 노력과 투자가 이뤄지고 있다. 의류산업만 보더라도 최첨단 IT가 웨어러블과 융합되고 있다. 국내 핀테크산업이 이처럼 융합 접점을 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부와 투자자, 금융사가 함께 방향성을 맞춰 성장할 수 있는 토양 마련이 시급하다.
길재식기자 osolgil@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