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떠올리면 입가에 미소가 번지면서 그 맛이 그립지만, 그때는 왜 그렇게 싫었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거의 매일 도시락 반찬으로 멸치조림을 빼놓지 않았다. 우리 5남매의 도시락 단골 메뉴는 멸치조림과 콩자반이었다. 멸치조림은 키 크는 보약이고 콩자반은 밭에서 나는 고기라는 엄마의 주장은 아무런 설득력이 없었지만 우리 형제들로서는 억지로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서는 생선초밥과 주먹밥에 멸치를 넣는다. 이탈리아에서는 멸치 비슷한 ‘안초비’를 샐러드, 피자, 파스타 등에 넣는다. 우리나라에서는 멸치를 볶거나 조림으로 먹는다. 멸치조림만 해도 그 종류가 수십 가지는 될 것이다. 대표적으로 꽈리고추와 같이 볶으면 영양은 물론이고 맛도 깊어진다. 그 시절에는 도시락 반찬뿐 아니라 밥상 위에도 멸치조림이 대표 반찬으로 오르곤 했는데, 영양학적인 결과이기보다는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다는 저장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멸치조림은 여전히 밑반찬계의 베스트셀러로 사랑받고 있는데, 소득 수준이 향상되면서 화려한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미국의 <타임>이 선정한 10대 건강식품 중 하나인 견과류와 만나면서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골다공증이 큰 문제가 되면서 칼슘의 보고인 멸치의 자존감은 뼈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하늘을 찌를 만큼 치솟는다. 멸치는 밥상이 아닌 술상에서도 위상을 떨치고 있다. 간장에 조린 멸치는 맥주와, 견과류를 넣고 조린 멸치는 와인과 잘 어울린다. 외국 친구들은 내가 짐 꾸러미에서 꺼내는 멸치조림을 ‘작은 생선’이라 부르곤 했다.
음식과 나의 관계가 만고불변(萬古不變)은 아니다. 어릴 적 그렇게 싫어했던 멸치조림을 이제는 친구들에게 권할 정도로 좋아하게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 사람과의 관계도 지금 소원하다고 해서 속상해할 일이 아니다. 앞으로 그 사람과 어떤 변화된 관계를 맺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그 사람이 싫다고 해서 상대에게 상처가 될 만한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섭섭한 마음을 꼭 내비칠 수밖에 없다면 신중하게, 부드럽게 해야 한다. 시간은 많은 것을 저절로 해결해준다. 유행가 가사에도 ‘세월이 약’이라고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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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고재선
그래픽 디자이너로 국내외에서 활동해 왔으며 식문화에 대한 이론과 실제에 밝다. 음식을 맛 이전에 다양한 시각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파악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글과 시각적 요소의 통합을 위해 직접 이 책의 북 디자인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