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핫이슈]진화하는 유럽 환경규제

유럽연합(EU) ‘신화학물질 관리제도(REACH)’로 대표되는 유럽 환경규제가 진화하고 있다. REACH 시행에 따라 현재 전체 대상 화학물질 3만여종 중 절반 정도가 등록됐다. 2018년까지 나머지 물질도 등록해야 한다. EU는 REACH뿐만 아니라 유사한 화장품 규제, 살생물제관리법, 식품접촉물질 규제 등을 제정하고 REACH 등록이 끝난 뒤에는 나노물질 규제 등을 새로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갈수록 강화되는 EU 환경규제가 대유럽 수출기업에는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다. 강력한 EU 규제는 국내 기업뿐만 아니라 모든 기업에 동일한 부담이 된다. 중국 등 후발국가 기업이 미처 대처하지 못하는 틈을 이용할 수도 있다. 특히 규제에 선제적으로 대응해 물질등록에서 주도권을 쥔다면 글로벌 규제에 보다 쉽게 대처하는 등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살아서 진화하는 환경규제

유럽은 REACH를 시작으로 환경관련 규제 수위를 점차 강화하고 있다. REACH는 화학물질 등록, 평가, 허가 및 제한에 관한 법률이다. 즉 상품에 사용하는 화학물질을 정밀 시험으로 분석하고 인체에 미치는 영향과 사용할 수 있는 분야 등을 정하는 것이다. REACH 발효 후 새로운 물질을 사용하려면 등록을 거쳐야만 하고 기존에 사용해 오던 화학물질 3만여종은 단계적으로 등록을 거쳐야 계속 쓸 수 있다. 고위험성물질(SVHC)로 분류되면 유럽 시장에서 퇴출시키는 것이 목표다.

현재까지 1만5000여종 물질이 등록됐다. EU는 화학물질 생산량에 따라 등록시기를 차등화했다. 연간 생산량 기준으로 1000톤 이상 물질은 지난 2010년까지, 100톤 이상은 2013년까지 등록을 마쳤다. 생산량이 가장 적어 주로 중소기업이 만드는 1~100톤 물질은 등록시한이 2018년이다.

국내 기업도 REACH 대응 준비를 해왔다. 그런데 REACH가 끝이 아니다. REACH와 유사한 또는 REACH에서 파생된 규제가 속속 생겨난다.

EU는 화장품을 안전하게 사용하고 시장 감시기능을 강화하고자 ‘화장품 규제’를 2009년에 제정하고 2013년 시행에 들어갔다. 화장품에 사용된 물질이 일으킬 수 있는 환경적 문제는 REACH를 적용해 관리한다.

2012년에는 미생물과 세균 등 살아있는 물체를 죽이는 ‘살생물제’를 안전하게 관리할 수 있는 별도법으로 ‘살생물제관리법’을 제정하고 2013년 시행에 들어갔다. 허가되지 않은 활성물질을 함유한 살생물제품은 EU 시장에서 판매를 금지한다.

결국 EU 시장에 화장품 하나를 수출하려면 몇 단계의 등록과 신고를 거쳐야 한다.

김상헌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유럽연구소 환경바이오 그룹장은 “국내에서는 이미 REACH 이슈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직 절반밖에 등록하지 않았고 후속 규제도 생겨난다”면서 “유럽에서는 이제 시작이라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강화되는 환경규제 이면

EU가 환경규제를 강화하는 것은 화학물질 등을 엄격히 관리해 편리하고 안전한 사용을 돕기 위해서다. 단적으로 EU 환경규제를 따른다면 우리나라에서 많은 생명을 앗아갈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됐던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김상헌 박사는 “가습기 살균제 문제는 화학물질과 살생물제 관리가 안 됐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며 “살균제 안에 포함된 성분은 EU에서는 카펫 청소 등에만 사용할 수 있다고 용도가 지정돼 있다”고 설명했다. 김 그룹장은 “우리나라에서는 해당 물질이 살균효과가 있다고만 하고 용도 지정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규제가 엄격해지면 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기업은 어려움을 겪지만 소비자는 보다 안심하고 제품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규제강화 이면과 이후 상황을 들여다보면 EU 이익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전현표 KIST 유럽연구소 박사는 “EU REACH를 만드는 데 가장 기여한 것이 유럽 화학관련 기업협회고, 화장품 규제 역시 유럽 화장품 기업이 모인 협회가 주도한 것은 아이러니”라며 “화장품 규제가 동물실험을 제한하면서 EU 내 기업인 로레알은 인공피부로 시험 대체키트를 만들어 6조원이 넘는 매출을 올린다”고 말했다.

REACH나 화장품 규제에 EU 내 기업이 미리 준비를 갖추고 제도 도입을 추진하면서 외국 기업에 진입장벽이 된 꼴이다.

다른 경제적 효과도 크다. 강화된 규제로 EU 내 시험인증기관은 활황을 맞았고 실험인력 등 일자리가 대거 만들어지며 고용창출 효과가 발생했다. 규제가 강화될수록 인력 수요는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강화된 규제를 기회로 만들어야

강화된 EU 규제는 국내 기업에 단기적으로는 위협이지만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따라 기회가 될 수 있다.

REACH 화학물질 등록은 대표등록과 공동등록이 있다. 대표등록은 단독으로 진행하는 것이고 공동등록은 컨소시엄에 참여해 여러 기업과 공동으로 자료 생산과 제출 등을 수행한다. 비용을 내고 컨소시엄에 들어감으로써 이미 등록된 물질 데이터를 구매해 함께 사용할 수 있다. 공동등록은 다시 등록을 주도하는 대표 등록기업과 단순 참여기업으로 나뉜다. 대부분의 한국 기업은 공동등록에 단순 참여기업으로 들어갔다.

국내 기업 중 대표 등록기업이 된 사례는 두 개 기업, 다섯 개 물질이 전부다. 다섯 물질 모두 KIST 유럽연구소가 대표기관을 맡아 등록했다.

김상헌 박사는 “규제에 선제 대응하고 향후 실리를 얻으려면 대표등록을 해야 한다”면서 “단독으로 대표 등록하거나 공동등록 시 대표등록자가 되면 컨소시엄 대표로서 실제 운영 측면에서 거의 전권을 가진다”고 말했다.

대표 등록기업은 당장 비용상 이익은 없지만 자료 지식재산권을 확보한다. 따라서 등록 후 해당 물질 자료를 다른 기업이 활용할 때는 이윤이 발생한다. 다른 국가 환경규제에 대응해 자료를 등록할 때도 지식재산권이 있는 대표 등록기업은 그대로 가져다 쓸 수 있다.

REACH 이후 계속 생겨나는 규제에 사전 준비도 필요하다.

김 박사는 “REACH 등록이 끝난 2018년 이후에는 나노 규제가 생길 것”으로 예상하며 “나노물질 등록은 유럽도 완전히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노 관련 유해성 시험을 많이 수행한 우리나라에 기회”라고 말했다.

나노 분야 선제 대응을 위해 미래창조과학부는 지난 7월 KIST 유럽연구소 안에 ‘EU 나노안전협력센터’를 개소했다. 센터는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스위스 재료시험연구소, 국내 나노안전 평가기관과 연계해 유럽 진출을 희망하는 국내 기업에 △나노안전 정보분석 △유럽 나노규제 대응지원 △나노시험 인증지원 등 업무를 수행한다.

권건호기자 wingh1@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