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어떤 시절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내게는 칼국수가 그렇다. 신문사에서 아트 디렉터로 일하며 잡지를 창간할 때였다. 새로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기쁨과 흥분은 아주 잠깐이었고 서너 시간 자면서 신문사에서 살다시피 했다. 11월에 나올 창간호 작업은 7월에 시작해서 10월 말이 되어서야 겨우 끝이 났다. 축하 모임 장소는 서울 혜화동의 칼국숫집. 화려한 곳은 아니었으나 밀가루 음식을 좋아한다고 소문난 미술팀에 대한 국장님의 배려로 결정된 장소였다. 중림동의 회사를 출발해 삼청터널을 거쳐 혜화동으로 넘어가는 길, 단풍이 우거진 하늘은 이미 늦가을이었다.
지금은 며느리가 대를 이어 하지만, 당시 이북 출신의 주인 할머니가 손수 만드신 반찬은 맛깔스러웠다. 따뜻한 칼국수 한 그릇과 손맛 담긴 반찬들이 몇 달 동안의 고생을 보상하듯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갔다. 그날 자리를 같이한 분들, 음식 맛, 길가에 흩날리던 단풍잎 모두 어제 일처럼 기억 속에 있다. 세월이 흘러 다시 찾았지만 그 집은 여전했다. 장소는 음식과 연결되고 음식은 기억과 이어진다.
한국이 국수라면 일본은 우동이다. 사누키(讃岐)우동으로 유명한 곳은 일본 시코쿠(四國)의 가가와(香川)현이다. 가가와 현은 일본의 47개 현 중에서 가장 작다. 그곳의 옛 이름이 우동 이름으로 잘 알려진 사누키다.
일본열도를 이루는 네 개의 주요 섬인 혼슈, 큐슈, 홋카이도, 시코쿠 중에서 시코쿠가 가장 작다. 시코쿠의 가가와 현은 인구 100만이 조금 넘는데 놀랍게도 우동 가게는 900개가 넘는다. 왜일까. 첫째, 해가 길고 강우량이 적어서 밀이 잘 자란다. 질 좋은 밀가루가 생산된다는 뜻이다. 둘째, 우동 맛을 좌우하는 간장의 주재료인 물맛이 좋다. 셋째, 생산되는 천일염의 품질이 좋다. 넷째, 앞바다에서 우동 국물에 쓰는 가다랑어와 멸치가 잡힌다. 한마디로, 가가와 현은 맛있는 우동을 만들 수 있는 최적의 자연 조건을 갖추고 있다.
가가와 현의 우동 가게는 우동 종류, 우동 맛, 우동 가격 그리고 가게 모습이 제각각이다. 밀가루 소비량이 일본에서 1위인 그곳 사람들은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간식으로도 우동을 먹을 정도다. 그들은 ‘우동 왕국의 국민’이다.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일본 불교 진언종의 창시자인 구카이(空海)대사가 고향인 사누키에 처음으로 우동 만드는 법을 전했다고 한다. 대사가 유학하던 당시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주변은 광대한 밀 경작 지대로 절마다 면 요리를 전문으로 만드는 승려들이 있었다고 한다.
사누키 우동의 특징은 국물 맛이 아니라 매끄럽고 탱탱한 면발에 있다. 종류가 다양해서 입맛에 따라 골라 먹을 수 있다. 국물 없이 파와 뜨거운 간장 소스를 부어 먹는 우동, 삶은 면을 건져서 간장에 찍어 먹는 우동, 면이 뜨거울 때 날달걀을 넣어 비벼 먹는 우동(가마타마釜玉 우동) 등 상식을 넘어선 색다른 우동을 맛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역사가 가장 오래되어 일본 문화청의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우동집과 면의 탄력을 높이기 위해 반죽을 발로 밟아 숙성시켜서 우동을 만드는 집이 기억에 남는다.
산속 깊이 초록빛 대나무 숲을 배경으로 논두렁 위에 우뚝 자리 잡고 있는 우동집도 있었다. 2006년 개봉한 일본 영화 <우동>에 등장한 수제 우동집으로 질 좋은 땔감을 쓰기 위해 산속에 있다고 했다. 그곳에서는 가스가 아닌 화력이 높은 장작을 때서 면을 재빨리 삶아낸다. 직접 먹어보니 우동값은 양에 따라 200엔에서 400엔 정도로, 노력에 비해 훨씬 싸다고 느꼈다.
그곳 우동집들을 다니면서 누군가 정성을 다해 끓여낸 우동 한 그릇으로 몸과 마음이 충만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많은 가게가 전통을 지키면서 우동을 만들고 있었다. 일본인들에게 우동이란 무엇일까? 일본인들은 우동은 그냥 우동일 뿐이지 요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육수로 맛을 낸 우리의 칼국수에 비해 맛도 가벼운 간장 맛으로 담백하다. 그들의 전통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으로 생활 속에 남아 있다. 지금도 사람들은 그 고집스러움에 존경을 표하며 산 넘고 물 넘어 우동 가게들을 찾아간다. 찾아온 손님들을 위해 가게에서는 고된 전통적인 방법으로 우동을 만들어 대접한다.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필자소개/고재선
그래픽 디자이너로 국내외에서 활동해 왔으며 식문화에 대한 이론과 실제에 밝다. 음식을 맛 이전에 다양한 시각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파악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글과 시각적 요소의 통합을 위해 직접 이 책의 북 디자인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