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선의 '프로이트 레시피'] 나를 살린 푸른 보약

[고재선의 '프로이트 레시피'] 나를 살린 푸른 보약

신맛을 내는 매실은 85퍼센트의 수분을 함유한 알카리성 식품이다. 피로회복에 좋고 해독작용도 뛰어나서 배탈이나 식중독을 낫게 하는 데 한몫한다. 항암 식품으로도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는 매실을 우메보시라고 부르는데 우리로 치면 김치에 해당하는, 일본을 대표하는 반찬이다. 일본인들은 흰 쌀밥에 우메보시를 얹어 먹는 생각만 해도 침이 꼴깍 넘어간다고 한다.

중국에서도 매실을 먹는다. ‘망매해갈’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는데 갈증이 심할 때 매실을 떠올리면 갈증을 풀 수 있다는 뜻이다. <삼국지>에는 조조가 한여름에 대군을 거느리고 가다가 목이 타서 행군을 포기하려는 병사들에게 조금만 더 가면 매실 숲이 있으니 빨리 가자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 말을 들은 병사들이 시큼한 매실을 상상하고 입안에 침이 돌아 물이 있는 곳까지 행군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진 작업을 위해 몇 달 동안 도쿄에 머문 적이 있다. 도쿄의 무덥고 습한 날씨에 타지 생활의 고단함이 더해지면서 마치 커다란 습식 사우나에서 하루 종일 지내는 것처럼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여름철 도쿄 직장인들의 맥주 사랑은 최고점에 달하는데 나도 금세 그들을 닮아버렸다. 근무 중에는 냉커피를, 퇴근 후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생맥주와 생선회를 입에 달고 살던 어느 날이었다. 쓰나미 같은 배탈이 나를 집어삼켰다.

나는 부글거리는 배를 감싸 안고 앓아누웠다. 몸이 아픈 것도 서러운데, 객지에서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마음까지 아프게 했다. 하루 종일, 어렸을 적 엄마가 끓여주셨던 흰죽과 깨소금을 살짝 뿌린 간장 한 종지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일본인 친구가 병문안을 왔다. 그녀가 들고 온 한 흰죽 가운데 분홍빛 우메보시가 예쁘게 앉아 있었다. 나는 배탈도 잠시 잊고 직업병이랄까, 본능적으로 ‘이건 무슨 디자인이지?’ 하는 생각을 했다. 일본인들은 배탈이 나면 흰죽과 함께 우메보시를 먹는다고 했다.

나는 우메보시를 좋아하지 않았다. 시큼털털한 맛 때문이었다. 그녀의 성의를 무시할 수도, 사진 작업을 더 이상 미룰 수도 없어서 죽과 함께 얼떨결에 우메보시를 입에 넣었다. 시고, 달고, 짠맛이 동시에 입안에서 맴돌다가 죽과 함께 목으로 넘어갔다. 신기한 것은 그날 바로 배탈이 나았다는 사실이다. 그 후로 속이 불편하면 약 대신 매실청을 한 숟갈 먹는다. 우메보시 김밥도 즐겨 먹는다. 급하게 먹어도 우메보시가 있으면 소화에 문제가 없을 거라는 믿음이 내게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했다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필자소개/고재선

그래픽 디자이너로 국내외에서 활동해 왔으며 식문화에 대한 이론과 실제에 밝다. 음식을 맛 이전에 다양한 시각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파악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글과 시각적 요소의 통합을 위해 직접 이 책의 북 디자인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