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선의 '프로이트 레시피']옛날부터 그렇게 해온 맛

[고재선의 '프로이트 레시피']옛날부터 그렇게 해온 맛

시래기가 웰빙 식품으로 대접받는 시대가 되었지만, 예전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쉽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시래기였다. ‘시래기 스무 동도 못 먹고 황천에 멱 감을 팔자’란 말은 정말 사나운 팔자를 뜻했다. 시래기는 무청이나 배추 잎을 말린 것이다. 새끼로 엮은 시래기두름을 처마에 걸어 말려서 시래깃국, 시래기찌개, 시래기떡, 시래기나물로 먹었다. 궁핍한 살림에도 우리의 어머니들은 식구들이 지루해하지 않도록 요리조리 머리를 써가며 온갖 레시피를 개발했다.

내게는 생일이나 성탄절보다는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 훨씬 더 좋았다.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이 난다. 그런 날이 다가오면 할머니는 방 하나를 통째로 비웠다. 크지 않은 집에서 방 하나를 비우는 일은 번거로웠지만 다들 참았다. 자발적인 협조의 바탕에는 그 방에 마련될 명절 음식에 대한 기대가 숨어 있었다.

할머니에게 음식이란 정성이었다. 강정과 산자 같은 전통 과자는 만드는 데 한 달이 꼬박 걸렸다. 통 크게 한 달 내내 먹고도 남을 만큼 푸짐했다. 맛도 당연히 좋았지만 과자들이 뽐내는 연두, 분홍, 연노랑의 파스텔 색조는 환상적이었다. 밀가루조차 귀했던 시절, 찹쌀과 온갖 곡물로 정성껏 만든 과자에는 멀리는 조상님부터 가까이는 할머니의 지혜와 인내가 담겨 있었다. 그런 할머니 밑에서 오래 시집살이를 하신 엄마의 집은 현대식 고층 아파트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색다른 시골 풍경이 펼쳐진다. 양평이 고향인 엄마는 푸성귀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시다. 엄마 집 베란다는 사시사철 가지, 호박, 고추, 시래기, 버섯, 고사리 등을 말리는 건조장과 다름없다. 제철 나물을 좋아하지만 미리 말려둔 나물들은 겨울이나 이른 봄에 입맛을 돋우는 반찬으로 밥상에 올라온다. 엄마의 밥상은 나물 천국이다.

그중에서도 단연 나의 총애를 받는 나물은 무청을 말린 시래기다. 시래기에는 비타민과 칼슘이 풍부한데, ‘봄의 기운은 쑥에, 가을의 기운은 무청에 있다’는 말도 있다. 엄마가 시래기를 넣고 해주시는 시래기 된장찌개나 고등어조림은 영양가도 높지만 기막히게 구수한 맛을 낸다. 정월 대보름도 내게는 설날이나 추석 못지않은 명절이다. 찹쌀, 팥, 차조, 콩을 넣은 오곡밥과 1년 동안 집에서 말린 나물을 골고루 맛볼 수 있다. 제철에 난 가지와 호박을 말려서 만든 나물은 오돌오돌 씹히는 맛까지 있어 입이 호강을 한다. 오랜 경험에서 나온 엄마의 손맛은 배운다고 해서 배워지는 것도, 따라 한다고 익혀지는 것도아니어서 내게는 풀지 못하는 숙제로 남아 있다. 손맛의 비법을 물을 때마다 “그냥 옛날부터 그렇게 해온 거야”라는 엄마의 말씀이 진정한 해답인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필자소개/고재선

그래픽 디자이너로 국내외에서 활동해 왔으며 식문화에 대한 이론과 실제에 밝다. 음식을 맛 이전에 다양한 시각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파악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글과 시각적 요소의 통합을 위해 직접 이 책의 북 디자인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