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다닐 때 수학시간이 그런대로 재미있었다. 공부를 잘하지는 못했지만 수학시간에는 깨어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수학 담당이어서 더욱 눈을 부릅뜨고 수업을 들었다. 지금 이만큼 밥 먹고 살게 된 것도 다 중고등학교 때 수학시간에 재미있어 했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예전 중국 사람들은 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를 음과 양이 서로 돌고 돈다고 보았다. 음과 양이 서로 돌고 도는 형상을 이미지화한 것이 태극이다. 사실 이러한 음양사상을 국기로 가지고 있는 나라는 세계에서 우리가 유일할 것이다. 이 음과 양이 컴퓨터로 따지면 0과 1이고 그래서 이미 이진법으로 움직이는 디지털이 세계를 움직이는 기본 이치임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가 괜히 IT강국이 아닌 듯싶다.
회사에서도 보면 숫자에 밝은 사람들이 일을 잘한다. 경영을 잘하는 경영자는 숫자에 밝다. 예전 수치와 다른 숫자를 보고 하면 여지없이 도끼눈을 치켜뜬다. 기억을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이들은 숫자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이게 바로 수치경영의 묘미다. 숫자는 서로 맞물려서 움직이기 때문에 중간에 한 숫자만 틀려도 바로 표시가 난다. 회사 경영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경영자는 전체적 숫자를 머릿속에 넣고 있기 때문에 뭔가 부자연스러운, 전체와 조화되지 않는 숫자를 금방 찾아낸다. 직장생활 35년에 숫자에 약한 CEO를 보지 못했다. CEO가 갖추어야 할 덕목 중에 결단력, 실행력, 통찰력 등이 있지만 사실 본질적으로 숫자를 볼 줄 아는 분석력을 갖추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대학원 1학년 때 조교를 했다. 하버드 출신 경제학 박사 밑에서 대학원 1년생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단순한 자료 정리였다. 한국은행에서 나오는 통계월보를 정리하고 분석했다. 어렵게 어렵게 1주일에 걸쳐 자료를 만들어 가면 교수는 5분 안에 틀린 부분이나 정부 경제정책이 변화한 부분을 바로 찾아냈다. 그 놀라운 통찰력에 나는 학문으로 대성할 자질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대학원 1학년 마치고 바로 군에 입대했다.
대기업에 다닐 때도 똑같은 경험을 했다. 사장은 공인회계사였다. CFO가 세 시간에 걸쳐 분기 실적을 보고할 때는 보고 장표가 100장 가까이 됐다. 보고 받다가 바로 질문을 하는데 묘하게도 거기에 꼭 숫자 오류가 있었다. 혹시 IT에서 잘못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자연히 나도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보고할 때마다 내가 먼저 오류를 찾아보려고 무지 노력했다. 그러나 내 눈에는 이상한 숫자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사장은 일일이 찾아냈다. 계산 틀리는 것을 찾아내는 것은 물론이고 의도적으로 감춘 숫자를 기가 막히게 찾아냈다. 정말 존경스러웠다.
카리스마가 있는 경영자는 전부 숫자에 밝다. 어쩌면 경영자 카리스마는 숫자에서 나오는지도 모른다. 숫자는 객관적이고 사실적이고, 냉정하다. 숫자를 가지고 경영하면 타협할 수 없고 속일 수 없고, 대충 넘어갈 수 없다. 정확한 숫자를 들이대는 경영자에게 임원은 스스로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모든 경영 기초는 숫자다. 재미있는 것은 실적이 좋을 때는 숫자가 그리 중요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경영이 나빠지게 되면 숫자가 매우 중요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경영자는 숫자를 머릿속에 잘 정리해서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만약 경영자가 숫자에 둔감하면 회사의 속살을 잘 알지 못한다. 겉은 그럴듯하면서 속으로 썩어 가게 되는 것이다. 대기업들도 고목 쓰러지듯이 쓰러지는 이유가 바로 경영자가 숫자에 약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숫자는 결과다. 그래서 숫자를 분석하다 보면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원인을 찾으면 대책은 금방 나온다. 사실 경영관련 숫자를 그래픽으로 호화스럽게 보여준다고 해도 그 숫자 이면에 숨어 있는 인과관계와 각 숫자의 상관관계를 알지 못하면 암만 들여다봐도 숫자 의미와 원인을 찾아내지 못한다.
나이가 들면서 이것저것 기웃거리다 보니 숫자는 물리, 화학, 체육, 역사, 음악, 미술, 천문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움직이는 것의 근본 원리임을 깨달았다. 그 숫자 속에 오묘한 진리와 시퍼런 진실이 숨어 있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가 결국에는 숫자로 나타나고 숫자로 표현되는 것이다.
수치경영이 너무 삭막하고 비인간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이 모여서 같이 생활하는 기업에서 어떻게 모든 것을 다 수치로 표현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수치는 단순히 경영 결과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직원 감정과 생각과 활동을 수치로 표현할 수도 있다. 개인 간 선호도, 회사 충성심, 업무 집중도, 생산성, 비전 인식 등 회사의 모든 정성적 부문을 측정하고 숫자로 표현할 수 있다. 측정이 없으면 개선도 없다는 말이 있다(No Measurement, No Improvement). 제대로 측정만 할 수 있으면 원인행위를 찾고 대책을 수립하고 개선사항을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하는 수치경영은 따뜻하고 인간적인 것을 포함한다.
경영자는 자기 회사를 개념이 아닌 구체적인 수치를 가지고 이해하고 기억해야 한다. 대차대조표, 손익계산서에 나오는 숫자를 적어도 5, 6단계까지는 추적해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회사 움직임이 한눈에 들어오고 회사 문제점이 바로 나타난다.
사실 투자사 애널리스트가 이런 일들을 한다. 아마 대부분 재무부서에서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하는 것과 경영자가 하는 것은 다르다. 기계적으로 하는 것과 소명의식을 가지고 수치를 보는 것은 다르다. 개인병원에서 환자에 따뜻한 애정을 가진 나이든 의사가 진찰할 때와 종합병원에서 2, 3분 만에 환자 진찰하는 젊은 의사의 차이라고 할까. 애정을 가지고 회사 수치를 보고, 머릿속에서 전체적인 사업 구조를 보고 강한 부분과 약한 부분을 구별할 줄 알고, 어디를 때려야 그 수치가 변하지를 알면 경영은 무지 쉬워진다.
한마디로 경영은 숫자다.
CIO포럼 명예회장(명지대 교수) ktle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