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급제 시장이 꿈틀거린다. 20년 이상 이동통신사가 주도하던 휴대폰 유통 시장이 변한다. 4월 도입한 20% 요금 할인이 공고한 3사 과점체제에 균열이 났다. 온·오프라인 대형 유통점이 가세해 속도를 높였다. 자급제 확산을 위해서는 유통업체 협상력을 강화하고 자급제폰이 많아져야 할 것으로 분석됐다.
◇선택 약정 400만 돌파 초읽기…자급제 틈새 열었다
자급제 틈을 연 건 20% 선택약정 요금할인이다. 미래창조과학부는 선택약정 요금할인율을 지난 4월 12%에서 20%로 확 끌어올렸다. 이동통신사 반발 속에 내린 과감한 결정이었다. 선택약정 본래 취지는 이용자를 차별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지원금을 받지 않은 이용자에게도 뭔가 혜택을 주자는 것이다. 하지만 내심 ‘자급제 시장 활성화’라는 목적도 있었다. 어떻게든 ‘이통사-휴대폰’ 간 견고한 고리를 분리하려고 한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경쟁을 늘리기 위해서다. 우리나라 휴대폰 시장은 세계에서도 드문 ‘폐쇄형 시장’이다. 이통사가 제조사에서 물건을 받아 각 대리점과 판매점·양판점에 공급하는 형태다. 이 비중이 98%를 넘는다. 세계 최고 수준이다. 우리와 비슷한 나라는 일본(95%)밖에 없다. 이통사를 거치지 않고는 제조사에서 휴대폰을 받아올 방법이 거의 없다. 경쟁이 없으니 휴대폰 가격이 비싸다.
지금까지 정부는 여러 차례 자급제 정책을 시도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소비자가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는 점이다. ‘보조금’이라는 절대적 유인이 있는 상황에서 굳이 자급제를 택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20% 요금할인은 보조금을 넘어서는 강한 유혹이다. 보조금을 받는 것보다 경제적 이익을 더 많이 얻는다는 확신이 생기자 시장이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휴대폰과 이통 서비스 판매를 분리하면 요금인하 효과도 노릴 수 있다. 외부에서 휴대폰을 사온 사람이 이통사를 골라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 선택을 받으려면 요금을 낮추고 서비스 품질을 높일 수밖에 없다.
요금할인율을 20%로 높인 미래부 선택은 일단 ‘합격점’을 받았다. 12% 때 일평균 850여명이던 가입자 수가 20% 때는 1만2000명으로 급증했다. 5월 이후 이달 초까지 약 350만명이 몰렸다. 현재 380만명을 넘어섰다. 연내 400만 돌파가 유력해 이통사 위협요소가 됐다. 3분기 실적이 나빴던 이통 3사가 “20% 요금할인 때문”이라고 울상을 지었을 정도다.
◇온·오프 대형유통 가세...중고폰도 인기
온·오프라인 유통업체가 가세한 것은 고무적이다. 이통 3사가 과점하던 휴대폰 유통경로가 다양해지기 때문이다. 경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전국 438개 점포를 갖춘 국내 최대 오프라인 유통업체 롯데하이마트는 올해 초부터 휴대폰 유통에 팔을 걷어붙였다. 매장 내 휴대폰 판매면적을 넓히고, 대형 매장에선 휴대폰 전용매대를 제일 좋은 자리로 옮겼다. 휴대폰 주변기기 보유량은 작년보다 세 배가량 늘렸다. 성장률이 둔화된 가전기기보다 성장여력이 크다는 점이 1차 이유다. 20% 요금할인 인기도 고려했다. 기존 이통대리점에서 휴대폰을 살 필요가 없어졌다는 점을 간파했다.
하이마트 관계자는 “휴대폰 하면 하이마트가 떠오르도록 할 것”이라며 “새해에도 휴대폰 판매를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픈마켓 11번가에서도 5월부터 이달 초까지 휴대폰 판매량이 작년 대비 37%나 증가했다. 오픈마켓 역시 이통사 유통망을 거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급제 활성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중고폰 인기도 자급제 시장에 청신호다. 중고폰 자체가 자급제 단말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중고폰 유통이 늘면 새 휴대폰과 서비스를 결합해 판매하는 이통사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11번가는 이달 1일 ‘안심 중고폰’ 코너를 개설했다. 대기업이 품질을 보증한다는 점이 핵심이다. 이 회사 박성민 팀장은 “20% 요금할인으로 중고폰 소비자가 꾸준히 늘고 있다”고 말했다. 올 1월부터 11월까지 11번가 중고폰 판매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80% 늘었다. 조만간 우체국도 중고폰 판매를 시작할 예정이어서 자급제 활성화에 큰 힘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자체 조달 늘리고, 자급제폰 많아져야
아직 과제는 많다. 엄밀히 따지면 20% 요금할인 가입자가 늘어나는 것만으로는 완전자급제가 실현됐다고 볼 수 없다. 아직 이통사와 휴대폰 판매가 완전히 분리됐다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이마트는 이통사를 통해 휴대폰을 구매한다. 제조사에서 바로 사오지 못한다. 이통사의 대형 대리점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통사에 얽매여 있는 것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20% 요금할인=과도기형 자급제’라고 할 수 있다. 이통사와 휴대폰 판매를 완전히 분리하는 중간단계인 것이다.
대형 유통점이 제조사에서 휴대폰을 사오지 못하는 것은 ‘최소 물량보장’ 때문이다. 우리나라 제조사는 ‘이통사향(向)’ 단말기를 만든다. 대신 이통사는 일정 판매량을 보장한다. 이런 체제가 굳어 있다. 제조사로서는 재고부담을 떠안아야 하는 자급제 단말기를 만들 이유가 적은 것이다.
이런 구도를 깨기 위해서는 이통 3사 이외의 유통채널이 강한 힘을 가져야 한다. 하이마트나 오픈마켓 같은 온·오프라인 유통망 힘이 커져야 하는 것이다. 휴대폰 판매량이 늘면 궁극적으로 제조사에서 물건을 직접 받아올 수 있다. 중소 판매점이 뭉쳐 공동으로 단말기를 조달하는 방법도 고민해봐야 한다.
제조사도 획기적인 자급제폰 출시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현재 46종의 자급제 단말기가 판매되고 있지만 대부분 판매량이 많지 않은 비인기제품이다. 통신 전문가는 “유통망 생존문제 등이 걸려 있어 자급제를 법으로 강제하기는 힘든 게 현실”이라며 “정부가 20% 요금할인 같은 유인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쳐 시장자발적으로 자급제가 정착되도록 유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용주기자 kyj@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