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바다 운동. IMF 구제금융으로 국민 삶이 피폐해 졌던 그 때,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자’는 뜻으로 등장한 시민운동이다. 요즘 한 케이블방송 인기 드라마에서처럼 아이들이 부모에게 “예전에 그런 것이 있었어”라고 물어볼 수도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운동의 정신은 협동조합, 아름다운가게, 지자체의 다양한 행사로 자원을 절약하고 활용을 극대화 할 수는 소중한 문화적 유산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약 10년 전 나는 DNA 바코딩 연구를 시작하면서 국내 몇몇 생물자원 표본 보유 기관을 방문해 연구에 필요한 표본 대여를 문의했다. 그러나 대부분 기관에서 돌아온 대답은 외부인에게 표본을 빌려 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표본 손상을 가져 올 수 있다는 이유다.
캐나다 방문연구기간 겪었던 경험은 이와는 대조적이다. 국내 기관의 이러한 대처 방식이 과학발전을 위해 옳은 것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만들었다. 캐나다 소장 기관 담당자는 3박 4일간 표본실에 머무르며 수천여개 표본 선별을 마칠 수 있도록 허락했다. 당신들이 어렵게 확보한 표본을 외부인이 연구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자원은 국가와 국민의 자산이다. 이 연구가 해당 분야 발전을 이루는 것이므로 얼마든지 필요한 곳에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우리나라 과학기술 연구에 투자되는 예산이 14조원을 넘어섰다. 국가 전체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 또한 5% 내외로 최고 수준이지만, 총액 규모면에서는 미국의 11분의 1, 일본의 5분의 1 정도로 주요 선진국과 경쟁하기에 어려울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정부는 이미 10여년 전부터 국가연구개발사업의 ‘아나바다 운동’이라 할 수 있는 연구성과물 재활용 체계를 구축하고자 노력해 왔다. 그 결과 연구논문, 보고서, 특허, 시설 및 장비, 기술보고서, 소프트웨어, 생명자원, 화합물, 신품종을 포함하는 9개 분야 중요 연구성과물 공유 체계가 구축됐다. 주로 등록에 의해 활용되는 성과물 공동활용체계 구축분야에서 많은 진전이 있었다.
그러나 국가예산 지원으로 얻어지는 연구결과물을 개인이나 기관 성과로 좁게 해석하는 문화가 남아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연구결과를 이용해 개인 소유 특허를 출원하는가 하면, 성과평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연구과정에서 얻어진 결과를 공유하는 데 인색한 사례를 심심치 않게 본다. 이런 사례는 단지 연구자나 기관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부 부처에서도 발견된다. 부처 간 중복 연구에 의한 국가 예산 낭비의 원인이 된다.
반면에 개당 약 1000만원 비용과 최소 3~4개월 제작 기간이 필요한 고가 유전자결실세포주를 활용해 세계적 연구결과를 발표한 K교수는 해당 세포주를 생물자원연구성과물로 기탁했다. 올 한해에만 국내외 관련 연구자에게 20건 이상 공동 활용 기회를 제공했다. 후속연구 활용으로 연구결과 우수성 입증과 더불어 자원을 제공받은 연구자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해당 세포주의 지속적 관리와 배송에 필요한 관리 부담을 덜어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 화합물은행에는 약 50만건 화합물이 확보돼 연간 20만점 화합물이 신약개발에 재활용되고 신약후보물질 선정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인 사례다.
정부는 최근 국가연구개발성과 관리와 활용에 대한 3단계 계획 추진을 통해 연구성과물 활용 극대화를 꾀한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의 성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연구자 성과 결과물을 공공재로 인식하고 공유하고자 하는 문화 정착이 우선돼야 한다. 특히 연구성과 평가에 중요한 요소가 되는 이른바 3P 성과(논문, 특허, 기술료) 외에 연구자의 적극적 기탁이 필요한 생물자원, 화합물 등 성과물은 실물자원이 타 연구자 연구에 재활용 될 수 있다. 실질적인 아나바다 문화가 우선적으로 정착될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이 강화돼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연구자 스스로도 연구성과물자원 공동 활용과 효율 극대화를 위한 노력과 역량을 키워야 한다.
박두상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미생물자원센터장, dspark@kribb.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