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에는 각 그룹 회장 신년사가 신문 지면을 장식한다. 올해도 예외 없이 크게 다뤄졌다. 그런데 이 신년사가 대내용인지 대외적인지 잘 모르겠다. 임직원 신년 하례식에서 발표하는 것을 보면 대내용 같기도 하고 또 언론에서 그대로 받아 적는 것을 보면 대외용 같기도 하다. 그래서 대내용이면서 대외용으로 발표하다 보니 내용들이 두루뭉수리하고 이런 내용을 굳이 언론이 마치 그룹 주요전략인 것처럼 발표하는 것이 과연 맞나하는 생각이 든다. 소위 그룹 회장 신년사 사회적 부가가치가 뭐냐는 점이다.
우선 회장 신년사를 종합해 보면 매년 똑같다. 성장해야 한다, 허리띠를 더 졸라 매자, 대외적 여건이 좋지 않다, 고객에 집중하자, 위기에 선제적 대응을 하자, 기본에 충실 하자, 품질에 충실하자, 글로벌 사업에 집중하자, 뭐 그런 내용이다. 내용도 그저 그렇고 그래서 그런지 신년사를 읽는 회장도 그리 큰 열정이 없어 보이고, 곧은 자세로 듣는 임직원도 감동이 없어 보이는 그런 신년회를 왜 매년 똑같은 형식으로 되풀이 하는지 모르겠다.
그룹에서 회장 파워는 막강하다. 임직원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고, 신규사업 승인, 계열사 간 사업 조정, 계열사 인수와 매각을 결정한다. 회장이 어떤 결정을 하는 데 반대할 수 있는 측근은 극소수다. 대부분은 보고하고 지시 받고 실행할 따름이다. 그래서 임직원 입장에서 그룹 회장은 거의 신적 존재다. 가까이에서 보지도 못하고 먼발치에서 가끔 스치듯 뵐뿐이다. 회장 동정을 신문이나 TV를 통해서 아는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임직원은 이런 자기 자신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회장의 진정한 생각과 견해를 듣고 싶어 한다.
회장 신년사를 사내방송을 통해서 듣거나, 사내보를 통해서 보는 직원 입장을 좀 헤아릴 필요가 있다. 신년사를 발표하는 자리에 직접 참석한 고위임원조차 관리자에게 굳이 자세하게 전할 내용이 별로 없다면 그 내용이 일반 직원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차피 사내 홍보팀을 통해 전달해서 내려 올 것이고 어차피 올해가 우리 그룹에 가장 중요한 시점이고, 그럴수록 원칙에 충실하자는 얘기일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회장은 당연히 창업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온갖 어려운 상황을 겪으면서 내공과 경륜을 쌓았다. 그들은 남이 안 된다고 할 때 자기 스스로 고독한 결정을 통해 지금 그룹을 일으켜 세웠다. 그래서 지금도 전설로 내려오는 각종 에피소드가 많다. 이들의 경영·사람에 관한 한 마디 한 마디, 중요 투자에 대한 의사 결정과정은 정말 가치 있는 그룹 자산이다. 이러한 자산은 후배 임직원에게는 영감과 교훈을 주고 그룹의 문화가 되고, 그룹 성장 밑거름이 된다.
지금 회장들은 대부분이 회장 2세, 3세다. 그래서 지금 재벌은 힘들게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기 보다는 외제 자동차 수입이나, 면세점 사업과 같이 독점 계약이나 인허가 받는 데 열을 올린다. 회사는 키워야겠고 그러나 대규모 투자를 해본 경험은 없고 그래서 대신 확실하게 돈 벌 수 있는 일만 찾아 나서는 것이다. 모든 재벌 2, 3세가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창업자를 능가하는 2세를 찾아보기 힘들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기업가 정신을 절실하게 찾는 이유도 그룹이 대물림을 하면서 창업가 정신이 희석되고 있기 때문이다.
회장이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는 만큼 자기 사업과 경영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외부 전문가와 밥 먹으면서 듣고, 컨설팅 받고, 밑에 임원이 보고하는 내용만을 듣고 대충 다 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절대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사람이 남의 머리를 잠시 빌려서 뭔가를 하려고 하면 괜히 귀 얇다는 소리만 듣게 된다.
와인, 그림, 건축, 오페라, 스포츠카에 정통하고 각종 인문학 모임에 빠지지 않는 그런 회장이 아니라 자기 그룹 고객, 임직원, 제품과 서비스, 사업, 경영에 정통한 그런 회장이 되어야 한다. 자기 사업 분야나 경영에 관해 스스로 책을 쓰고 논문을 발표하고 강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그래야 과감한 투자도 가능하고 임직원에 대한 리더십도 생긴다.
회장이 얘기한대로 올해 경기가 어려울 것이다. 연초부터 중국경기, 유가하락, 북한 수소탄 등 악재가 꼬리를 물고 있다. 거기다가 올해 우리나라는 총선도 있고 미국은 대선이 있다. 외부 환경에 배가 흔들릴 때 선장이 강력한 오너십을 가지고 진두지휘해야 위기를 탈출할 수 있다. 그래서 스스로 사업에 대해 구체적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전면에서 진두지휘하는 그런 실무형, 실천형, 위기돌파형 회장이 필요한 때다. 그길 만이 지금 우리 기업이, 재벌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회장이 그 역할을 하지 않으면 그룹에서 누가 대신해서 할 수 있겠는가.
우리 임직원은 맨 앞에서 칼을 높이 쳐들고 나를 따르라고 하는 회장의 비장하고 심오하고 전략적이고 자기희생적인 그런 신년사를 듣고 싶어 한다.
CIO포럼 명예회장(명지대 교수) ktlee@gmail.com